시간의 틈

선택의 문

by 윤슬

창밖에는 별 하나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새 세상은 고요해졌다.


“딩!”


맑고 기묘한 전자음과 함께 눈을 떠보니, 민수는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사방은 안개처럼 뿌옇고, 바닥엔 형광 조명이 흐르는 회색 타일이 깔려 있었다.

눈앞에는 기묘한 자판기 하나가 있었다. 커다랗고 반짝이는 화면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인생 선택 자판기

원하는 직업의 버튼을 누르세요



“이게 뭐야… 꿈인가?”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판기를 살폈다. 자판기에는 다양한 직업명이 쓰인 버튼들이 줄지어 있었다.


[경찰관] [축구선수] [의사] [변호사] [가정주부] [예술가] [유튜버] [교사] …


민수는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야…”


조금 전까지 그는 소파에 누워 TV를 보며 잠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한 공간, 마치 백화점 한복판에 설치된 듯한 자판기 앞에 서 있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 소리도 없다. 그저 조용하고, 묘하게 포근한 공기만 가득하다.

‘꿈인가…?’

하지만 손끝에 닿는 자판기의 촉감은 너무도 생생했다.


“직업 자판기…?”


자세히 보니 작은 글씨가 자판기 아래에 적혀 있었다.


'과거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직업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단, 각 삶은 끝까지 살아볼 수 없습니다.
체험은 한 번에 하나씩, 현실 복귀는 임의 시간입니다.'


민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언제나 다른 인생을 꿈꿔왔다.
다른 회사를 선택했다면?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면? 다른 대학에 갔다면? 전공을 바꿨다면?
불평과 후회는 그의 일상이었고, 다른 삶에 대한 갈망은 손톱 밑 가시처럼 늘 찝찝했다.

그런 그 앞에, 이런 자판기가 나타난 것이다.


“내가 과거에 한 번쯤 꿈꿔본 직업들이잖아… 설마, 이걸 누르면 진짜 과거로 돌아가는 건가?”


그는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경찰관’ 버튼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경찰이라… 멋있을지도 몰라.”


버튼을 꾹 누르자, 자판기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삑- 경찰관 체험을 시작합니다.”


그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눈앞이 하얘지고, 바닥이 꺼지는 듯한 느낌.


“으… 으아아아악!”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몸이 가벼워지고, 공기 중으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뒤..


“김민수! 자꾸 졸면 어떡하냐!”


딱!

교탁을 치는 소리에 민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앞에는 낯익은 고등학교 교실.
창밖으로는 여름 햇살이 내리쬐고, 주위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어… 뭐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자, 익숙한 교복 소매.
팔뚝은 말라 있고, 책상 위엔 ‘진로 조사서’가 놓여 있었다.

민수는 얼떨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고3이 된 거야?”


칠판 위에는 “여름방학 보충수업 7월 28일(수)”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한참 진로 선택으로 고민하던 그 시기, 그가 개발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바로 그 여름이었다.

책상에 놓인 종이엔 다양한 직업 항목이 적혀 있었고, 그중 하나에 ‘경찰’이라고 연필로 살짝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때였다.
교실 뒤편에 기묘한 기계가 하나 나타났다. 바로, 그 자판기였다.
다른 학생들은 보지 못하는 듯 그 자판기를 무시한 채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고, 민수만이 그 자판기를 바라볼 수 있었다.

자판기 화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경찰관] 경로 선택 완료. 경찰관의 삶을 체험합니다.
체험 중 종료를 원할 경우, 자판기로 돌아와 [다른 삶 선택]을 누르세요.


그는 어리둥절했지만, 머릿속엔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느낌이 돌았다.


“그래… 한 번 사는 인생, 다시 선택할 기회라면 진심으로 해보자.”


그 순간, 교실이 흔들리듯 흐려졌고, 민수는 또 한 번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곧, 그는 경찰서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경찰의 삶으로 살고 있는 그의 이야기의 시작은 이제 막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