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 무언가에 닿기도 전에 녹아내렸지만 마당 한편 갈색빛으로 꼿꼿이 서 있는 아나벨 수국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습니다.
주인장의 취향을 그대로 품은 삼베커턴을 재쳐걸어두고, 탁자 위에 놓인 처음 먹어보는 듯한 이 집만의 독특한 자몽차의 향과 어울릴 이야기들을 이분들과 나눕니다.
하얀 양모털로 만든 별 하나가 꽃병 곁에 얌전히 기대어 있습니다. 아마 주인장의 솜씨인 듯합니다.
눈을 쫓아 나간 뒷마당엔 보라색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습니다. 저렇게 멋스러운 보라색꽃의 이름이 한참이나 생각나지 않았지만 꽃병에 꽂힌 몇 송이를 보며 '아스타 국화'라 기억해 냅니다.
우리들의 대화가 그랬는지, 뜨개질을 하던 주인장이 직접 기른 무화과 몇 쪽이 담긴 빵접시를 살그머니 밀어놓고 가십니다. 주인장의 솜씨가 어떠한지 금방 알 수 있을만치 예쁘게 플레이팅 된 빵조각은 저절로 진실의 입꼬리가 올라갈 만큼 달콤하며 부드럽습니다.
"원장님 이런 카페 참 잘 어울리는데... 한편에 책들 쌓아놓고 글도 적으시고"
이날도 어김없이 저는 카페사장이 되길 추천받습니다. 아마도 저의 성향과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40대 말즈음, 스케치한 꿈이 있었습니다.
어린이집을 짓겠다고 땅을 구입했지만, 넓은 잔디밭이 있는 마당에 3층 짜리 건물을 짓고 싶었습니다.
1층엔 북카페가 있고, 2층엔 성능 좋은 음향기기가 구비된 세미나실을 만들고, 3층엔 저희 가족들이 살 집이 있는 건물. 그리고 마당 곳곳에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함께 체험할 공간들을 만들어 자연을 누리어 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10년 전 남편이 덜컥 지금 살고 있는 '학상리'에 집을 지었습니다.
마당에 잔디가 심겨 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땅을 구입하고, 그해에 2층짜리 건물을 지었습니다. 1층에 북카페는 아니지만 저만의 카페가 있고, 성능 좋은 노래방기기가 설치된 2층이 있고, 마당 곳곳에는 저만의 체험 공간이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와서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손녀가 태어나면서 2층은 작은 어린이집으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는 돈 안 버는 카페사장인 거 같습니다.
나의 사랑에게.
'왠수'로 시작해서 '하늘'로, 이제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의 삶에 주연으로 살아온 날들이 벌써 40년 가까이 채워지고 있네요.
마흔 번째 나의 생일에 기둥(큰 아이)이 보내온 편지에 아빠랑 엄마는 '천생연분'이라 적어 놓았더군요. '사랑'으로 시작해서 '왠수'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부부들도 있겠지만 이제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기에 그리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기둥의 말처럼 천생연분인가 봅니다.
남의 편이어서 남편이라 말들 하지만 오랫동안 같은 집에 살면서 나의 편이 되어줌에 감사해요.
아내이기보다 보호해야 하는 막내여동생처럼 대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큰 형님 말씀처럼 철이 들면 훅 날아가버릴까 그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덕에 지금도 여전히 철없는 30점 아내로 살고 있죠.
무언가를 툭 하고 이야기하면,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처럼 언제인지 모르게 떡 하니 나의 앞에 준비되어 있었어요. 이 집 속에 나의 모든 희망사항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걸 보니 늘 나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우리 집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연적이 있었지요.
무대인 테라스에 근사한 조명등을 달아 놓고 기다리던 당신. 많은 분들이 멋진 분이라 말해 주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