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내 결혼 소식이 알려졌을 때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대게 믿을 수 없어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왜 결혼을 갑자기 한다는거야?"
똑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듣는 우리는 조금씩 지쳐갔다. 미국 현지에서 결혼식을 준비하다보니 사람들에게 비대면으로 인사를 시키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박연준. 장석주 저)와 비슷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글'로 설명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용기를 내서 직접 wix라는 툴을 이용해 홈페이지를 만들어보았다. 1년 간 운영을 하는데 100불 정도의 비용을 내긴 해야 했지만, 마음껏 사진을 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웹과 모바일 호환이 용이해 모바일 청첩장 대신으로 쓸 수 있었다. 어차피 스튜디오 촬영샷 같은 건 없었기에 미국 여기저기서 찍은 여행사진으로 구성되었다. 코로나 시국으로 200명 게스트 한정이었기에 RSVP 기능도 포함하였다. 그리고 가상의 인터뷰어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우리 이야기' 코너를 구성하였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포함되었다.
1. 친구들에게 상대방을 소개해주시겠어요?
2. 상대방의 가장 이상한 점은 무엇이죠?
3. 다섯 가지 단어로 상대방을 표현한다면?
4. 왜 결혼이라는 중대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셨죠?
5. 언제가 가장 로맨틱한 순간이었나요?
6. 은퇴 후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지금 생각해보니 꽤 재밌는 작업이었다. 글을 쓰는 데에 알러지가 있는 남편이 간략하게 답을 쓰면 내가 구술 형태로 받아적어 조금 살을 붙여서 최종 기사를 만들었다. 미국친구들을 위해서도 영어로 뉴스레터를 만들었었다. 남편이 처음 해 준 요리가 무엇이었는지, 가장 싫은 모습은 무엇인지 등 ㅎ
2021년의 나는 결혼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결혼이 인생의 우선순위는 아니었어요. 세상에 즐거운 일은 워낙 많으니 결혼에 따른 사회적 제약을 받을 바에 혼자 책임감 있게, 재미 있게 잘 사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미국에 홀로 유학와서 코로나 기간 동안 극단적인 고립을 겪게 되었어요. 학교(자그마치 18개월 닫았다가 최근 열었답니다), 도서관, 카페, 체육관, 음식점 등이 문을 닫은 상태에서 3명의 기숙사 룸메이트들이 계약을 해지하고 전부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50평이 넘는 아파트에 저 혼자 두어 달을 있었어요. 그 기간 동안 제가 혼자서는 못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제 삶 속의 아주 작은 즐거움조차 다른 사람들의 도움 속에서 가능했다는 것을요.
또 미국은 개인의 영역을 존중하는 나라인 만큼, 한국에선 국가의 책무인 일도 미국에선 개인의 책임인 경우가 많아요. 가난한 지역일수록 공교육이 안좋고, (좋은) 직업이 없으면 병원에 가기 어렵고, 우리나라의 출산 후 아이돌보미 지원 같은 건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에요. 그렇다보니 미국 사람들은 안전, 보험, 교육, 복지 등을 가족에게 기대는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여가시간의 상당 부분을 직장동료나 친구가 아니라 가족에게 투자를 하고, 외부활동을 할 때도 가족을 동반하곤 해요. 그렇게 대놓고 사랑하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결혼이 단순히 새로운 의무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세상을 함께 짊어지는 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어요.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쯤 신랑을 만났어요. 저는 여성에게 암묵적으로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에 부담을 느끼는 편인데, 신랑은 제 입장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다 듣고싶어하고 또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결론을 함께 만들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더라구요. 그래서 신랑이 생각보다 이르게 결혼을 이야기했을 때에도 거부감보다는 포근한 마음이 들었어요. 음, 뭔가 찜찜함이 없었다 내지 seamless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웃음)"
솔직히 미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결혼을 했을지 잘 모르겠다.
내 경우 미국에서 혼자 살기가 한국에서 혼자 살기보다 훨씬 힘들었다. 여기는 인건비가 정말 비싸서 웬만한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 요리, 가구 조립, 화재경보기 고치기 등등. 병원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일상적인 행정실수는 또 어찌나 많은지. 분명히 돈을 냈는데 안 냈다고 편지가 날아오고, 담당자를 잘못 만나면 일처리가 한없이 늦어진다. 외국인으로서 비자 문제까지 있다면 스트레스 1스푼이 추가된다.
우리나라는 정부기관 담당자 연락처가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어 누구나 전화를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정부기관과 뭔가 해결할 일이 생기면 '변호사'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 세금신고를 하다가 세법 해석과 관련되어 의아한 일이 있다면 공인회계사를 찾아가서 상담비를 내고 물어보아야지 국세청(IRS)에 전화해서 "제 상황이 이런데요~ 이걸 이 항목으로 보고해야 할까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콜센터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있어도 과연 이야기를 해줄지도 의문이다. "택스 리포트를 먼저 해보세요. 최종 결정이 있기 까진 아무것도 확답드릴 수 있는게 없어요"라고 하지 않을까. 그래서 미국에선 개인이 변호사, 회계사를 고용하는 일이 흔하다(우리도 2년 전부터 세금신고를 하기 위해 개인 회계사를 고용하고 있다. 비싸지만 정말 말도 안되게 편하다!).
* 미국 특유의 사회 인프라가 왜 '가정'의 필요성을 높이는지 궁금하신 분은 다음의 글을 참조하시길:
10화 미국 사람들이 결혼을 많이 하는 7가지 이유 (brunch.co.kr)
숨쉬고 사는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예측 불가능하게 여기저기서 떨어지는 유지관리 업무를 둘이 같이 하면 훨~~씬 편하다. 우리 집의 경우 문서 읽는 일은 내가, 몸 쓰는 일은 남편이 한다. 논리적 싸움은 내가, 비논리적 싸움은 남편이 도맡는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비해 교육열이 낮은 이유는, 생존에 드는 에너지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추정도 해본다. 자식이 스스로 숨쉬고 살 수 있게 된다면 일단 성공한 것!
어제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와 시애틀 공항에서 벨뷰까지 급행버스를 탔다. 시애틀에는 택시가 거의 없고 Uber와 Lyft만 있는데, 평소 50불 정도 나오는 구간이 손님이 많아졌기 때문인지 120불로 폭등한 상태였다. 결국 1시간에 1대 오는 버스를 40분 정도 기다려 타게 되었다. 남편이 말했다.
남편: 이렇게 큰 도시에 대중교통이 이거 딱 한 대밖에 없다는 게 말이 돼?
나: 난 이거라도 있어서 솔직히 다행이다 싶어.
남편: 120불로 2배 이상 오르는 것도 진짜 대책 없고.
나: 미국이 미국하는 거지 뭐 ㅋㅋㅋ
남편: 한국이라면 버스 여러 대가 있을텐데.
나: 만약 대중교통이 안되어 있고 택시가 너무 비싸면 한국 사람들은 서로 돕는 시스템 같은 걸 만들지 않았을까? 별로 안 친한 친구도 공항 픽업을 서로 해준다든지. 돌아오는 시간을 맞춘다든지. 약간 품앗이처럼. 왠지 여기선 정말 가까운 사람 아니면 그런 부탁을 못하겠어. 우리 어릴 땐 반에서 컴퓨터 잘하는 애가 친구들 컴퓨터 고쳐주고 그랬는데, 미국에서도 그럴까?
남편: 음. 그렇지 않을까?
나: 왠지 잘 상상이 안되네.
여기에 살다보면, 이런 순간들이 종종 있다.
팀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
밤 11시에 혼자 40분을 기다리려면 얼마나 무서웠을까.
정류장에 서 있기가 무서워서 공항 안에서 유리창으로 바깥을 보고 있었겠지.
혼자 120불짜리 택시를 타면 더 아까웠을 것이다.
이렇든 저렇든 서러울 수 있던 일인데, 둘이서 함께 하면 재밌는 이벤트가 되기도 한다. 비오는 날 수다 떨며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즐거웠다. 집에 돌아가서 자정에 '홍대 초마 짬뽕'을 개시하리라는 다짐을 나누며. 집에 돌아와서 양배추를 달달 볶아 인스턴트 짬뽕을 만들었는데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