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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용등급은 전투력이다

'신용등급 = 전투력', 신용등급 1등급부터 10등급까지 능력이 부여..

by SeaWolf

카드 명세서가 찢어지는 소리는, 김민준의 심장 박동보다 먼저 그의 신용등급을 8등급으로 밀어냈다. 중력이 강해진 듯, 그의 쇄골 아래에는 납덩이가 자리 잡은 듯했다. 낡은 아파트 복도, 희미하게 번지는 형광등 아래, 그는 찢겨진 명세서를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숫자는 단순한 기호였지만, 그의 혈관 속 콜레스테롤처럼 서서히 막혀가는 무언가를 상징했다. 8등급. 실패의 잔향, 무능의 조각, 그리고 희미하게 식어가는 삶의 온기였다.


아침 출근길, 민준은 늘 그렇듯 지하철에 몸을 던졌다. 사람들 틈새는 습하고 뜨거웠고, 그들의 시선은 앞을 향했지만 누구에게도 제대로 닿지 않는 듯했다. 거대한 물고기 떼처럼 정해진 노선을 따라 움직이는 그들. 그는 자신이 그 물고기 떼 중 하나라는 사실에 가끔씩 숨 막혔다. 그의 존재는 너무나 희미해서, 지하철에서 누가 쓰러져도 별다른 동요 없이 스쳐 지나갈 정도였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존재감은 점점 더 희미해져갔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처럼, 미미한 파문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회사 사무실은 냉랭한 공기로 가득했다. 민준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하루 종일 숫자와 씨름했다. 그의 보고서는 늘 팀장에게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훌륭하다’는 소리는 듣기 힘들었다. 회식 자리에서 그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애썼지만, 그의 말은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처럼, 그의 존재감은 희미하게 흔적만 남겼다.


점심시간, 민준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계산대 앞에는 1등급 신용카드를 가진 듯 완벽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핸드백이 들려 있었고, 그녀의 미소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준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의 시선이 송곳처럼 그의 등을 쏘는 듯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초라함과 나약함을 더욱 실감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조금씩 일그러져 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색이 바래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저녁 퇴근길, 스마트폰에서 연체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카드 대금 미납! 즉시 납부하십시오!” 메시지는 단순한 문자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의 삶을 조여오는 올가미였고, 그의 영혼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였다. 마치 검은 고양이처럼 은밀하게 다가와 그의 발목을 잡는 듯했다. 메시지는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 끊임없이 확장되는 그림자였다.


집에 돌아온 민준은 소파에 몸을 던졌다. TV에서는 화려한 광고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최신 스마트폰! 지금 바로 구매하세요!” “해외여행! 지금 예약하면 할인!” 광고 속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민용에게 그 행복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걸까? 내 영혼의 무게는 이 8등급에 비례하는 걸까?”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을 바라보았다. 별들은 저마다 다른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빛은 그의 어두운 마음을 완전히 밝히기에는 부족했다 - 별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빚’을 담고 있는 듯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머릿속에 섬뜩한 은유가 떠올랐다: 신용등급은 마치 중력과 같아서, 그의 삶을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8등급이라는 중력장 안에서 그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 움직일수록 더 힘이 들었고, 숨쉴수록 더 답답해졌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제약이 아니었다 - 그것은 선택의 자유를 빼앗고 미래를 예측 불가능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그는 이 8등급의 중력장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운명이었을까?


그리고 또 다른 은유가 떠올랐다: 연체 알림 메시지는 마치 현대인의 영혼에 새겨진 문신과 같아서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을 상기시켜준다.. 그것은 단순히 카드값을 내야 한다는 통보가 아니라 - 그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질문이었다.. "너는 얼마나 쓸모있는 존재인가?" "너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가?" 그 문신은 점점 번져나가 그의 영혼 전체를 감싸려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은유는 조금 더 기괴했다: 신용카드 숫자는 마치 개인의 DNA 코드와 같아서 삶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것은 단순히 소비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코드로 작용한다.. 8등급이라는 숫자는 그의 유전적 결함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마치 완벽하게 설계된 시스템 안에서 불량품으로 분류된 것처럼 느껴졌다..


민준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연체 알림 메시지가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 “카드 대금 미납! 즉시 납부하십시오!” 그 메시지는 이제 단순한 문자 이상이었다 - 그것은 그의 심장을 조여오는 밧줄이었고, 그의 영혼을 잠식해가는 그림자였다.. 그는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블랙홀의 중심에는 끊임없이 확장되는 8등급이라는 숫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순간 민준은 결심했다. 그는 다음 날 점심시간 대신 퇴근 후 부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 비록 작은 변화겠지만, 그는 이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김민준의 어깨는 8등급이라는 중력에 눌려 골목길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퇴근 후 부업으로 택배 상자를 옮기던 그는, 붉은 간판 아래 술에 절어 비틀거리는 취객과 마주쳤다. 취객은 젊은 여성을 붙잡고 거칠게 웃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애써 외면했을 터였다. 하지만 연체료처럼 쌓인 분노와 스트레스가 목구멍까지 차올라왔다.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은 단순한 짜증이 아니었다. 8등급의 무게, 무능력함에 대한 자조, 삶의 답답함이 뒤섞여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색이 바래버린 희망을 깨뜨리는 폭발적인 에너지였다. 그의 8등급은 시간의 침식, 기회의 박탈, 존엄성의 하락을 의미했다.


그는 무심하게 주먹을 날렸다. 취객의 뺨을 맞힌 순간, 주먹에 담긴 연체료가 마치 형광색 액체처럼 흘러나와 그의 몸을 잠시 얼어붙게 만들었다. 수십 개의 작은 얼음 결정들이 취객의 얼굴을 감싸며 번져갔다. 평범한 펀치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특별한 힘이 느껴졌다. 연체료 가시는 그 순간 세상의 모든 '빚'이 시각화되는 듯했다. 취객은 잠시 든 채 “아얏!” 하고 짧게 소리치며 뒷걸음질쳤다.


“괜찮으세요?” 민준은 여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네…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레딧 파이트! 흥미롭군.”


여성은 민준에게 소개했다. “박서연이에요. 데이터 분석가죠. 방금 당신의 펀치, 아주 독특하네요.” 박서연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 날카로웠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희미한 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 그녀 역시 보이지 않는 '빚'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크레딧 파이트요?” 민준은 되물었다.


“신용등급이 곧 전투력인 세상이죠.” 서연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단순히 돈을 잘 벌고 잘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신용등급은 개인의 에너지 레벨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녀는 마치 고대 연금술사가 원소를 탐구하듯 신용등급을 분석했다.


민준은 반신반의하며 그녀를 따라 허름한 카페로 들어갔다. 서연은 태블릿 PC를 꺼내 민준의 신용등급 정보를 보여주었다. “보세요, 당신의 신용등급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에요. 당신의 활력, 선택권, 존재 의미까지 규정하는 사회적 가치입니다.” 태블릿 화면에는 복잡한 그래프와 함께 민준의 신용 정보가 떠올랐다.. 마치 그의 영혼을 해부한 듯했다.. 그의 등급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기혈이 고갈된 상태와 닮아 있었다 - 활력이 떨어지고 생명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8등급… 최악이네요.” 민준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최악은 시작일 뿐이에요.” 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요.”


서연은 민준에게 ‘연체료 가시’라는 능력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주변 사물을 바라보면 그 사물에 얽힌 연체료가 희미하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의자에는 잔잔한 금빛이 감돌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묘한 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세상 모든 곳에는 보이지 않는 ‘빚’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도시 전체가 거대한 연체 알림 메시지로 뒤덮인 듯했다.. 연체료 가시는 단순한 시각적 능력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는 감각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버스 안 노부부의 잔잔한 한숨에서는 곰팡이 냄새와 함께 희미한 금빛이 풍겼고, 지하철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젊은이들의 고독에서는 더욱 짙은 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편의점 계산대 앞 직원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깊게 박힌 절망감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을 공유하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빚으로 뒤덮여 있네요.” 민준은 감탄하며 말했다..


“그렇죠.”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퍼스트뱅크는 그 빚을 가장 많이 가진 자들이에요.” 퍼스트뱅크는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었다 - 그들은 정치권과 결탁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고, 국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거대한 거미줄이었다..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소비주의를 만연시키는 주범이었다..


다음 날부터 서연은 민준에게 크레딧 파이트를 위한 기본 훈련을 시작했다 – 체력 단련, 에너지 컨트롤, 공격 기술 등이었다.. 그는 자신의 등급에 맞는 능력을 연마했다 – 연체료 가시(주변 사물의 연체료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음), 이자 폭탄(주변 사람들의 이자를 흡수하여 힘을 얻음), 카드 한도 압축(상대의 카드 한도를 줄임)이었다.. 그는 녹슨 기어가 기름을 만나 돌아가는 것처럼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숙달해갔다.. 이자 폭탄을 사용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 활력이 넘치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꿈속에서 두 번째 연체 알림 메시지가 나타났다 – 단순한 문자를 넘어 점점 커다란 괴물처럼 변형되어 민준을 삼키려 했다.. 괴물은 그의 과거와 현재를 뒤틀고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괴물의 입 속에서 끊임없이 허우적거렸다.. 괴물은 그의 아버지의 실패, 어머니의 희생, 그리고 그의 무능력함에 대한 자조를 상징했다 – 그가 해결하지 못한 '빚'들이 형상화된 존재였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괴물의 잔상은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제 그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에서 미묘한 불안과 좌절을 읽어낼 수 있었다 –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걸린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을 공유하고 있었다... 크레딧 파이트는 단순히 개인적인 전투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밤의 무게가 점점 깊어질수록, 꿈속 괴물의 형상이 더욱 선명해졌다. 놈의 입 속은 이제 아버지의 낡은 운동화 냄새와 어머니의 희생처럼 희미해진 미소뿐 아니라, 민준 자신이 매일 밤 되뇌던 자조적인 독백들의 뫼비우스 띠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괴물의 잔상은 그의 시야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망막에 새겨진 것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었다. 주변 세상은 오래된 레코드판의 긁힘 소리처럼 미묘하게 왜곡되어, 모든 색이 약간씩 탁해진 채로 보였다. 마치 깊숙이 침투한 염색약처럼.


퇴근길 지하철 안,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겨울 나무 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잎처럼 위태로운 불안이 드리워져 있었다. 민준은 문득 깨달았다. 그들의 얼굴 위에도, 옷 위에도, 심지어 손에 들린 스마트폰 액정 위에도 보이지 않는 ‘빚’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마치 녹슨 철문의 붉은 녹처럼, 혹은 오래된 필름의 미세한 스크래치처럼, 세상 모든 곳을 감싸고 있는 ‘빚’이었다.


그때, 그의 능력이 발현되었다. 시야 속에서 주변 사물에서 희미한 빛깔의 연체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하철 좌석에는 닳아 헤진 엉덩이만큼의 연체료가 쌓여 있었고, 옆에 앉은 젊은 여성의 핸드백에서는 카드 명세서만큼의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노인의 지팡이에는 세월만큼이나 두꺼운 연체료가 엉켜 있었고, 아이의 손에 들린 사탕 봉투에서는 달콤한 맛만큼이나 작은 연체료가 반짝였다. 연체료는 각각의 사물과 사람에게 깃든 삶의 무게, 선택의 제약,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담고 있었다. 민준은 마치 보이지 않는 촉수로 그들의 고통을 느꼈다. 연체료는 삶의 활력을 빨아들이는 기생충 같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탱하는 투명한 거미줄 같기도 했다.


점심시간, 회사 동료들과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데도 그는 평소와 다른 감각을 느꼈다. 동료들의 웃음소리는 어딘가 어색했고, 그들의 대화 속에는 미묘한 경쟁심과 질투가 숨겨져 있었다. 김 부장의 등짝 스매싱 같은 잔소리조차도 이제는 ‘빚’으로 느껴졌다 – 그의 완벽주의는 끊임없이 소비를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의 압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완벽을 향한 김 부장의 열망은 결국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채무 증서와 같았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손을 뻗어 옆 테이블에 앉은 박 대리의 머리 위로 연체료를 훑어보았다. 박 대리는 최근 승진했지만, 그의 머리 위에는 알게 모르게 쌓인 연체료가 마치 왕관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승진 뒤에 숨겨진 불안감과 끊임없이 더 높은 지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상징했다. 승진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지 아래 숨겨진 ‘빚’이었지만, 그 ‘빚’은 DNA PC에서 발현된 그의 탁월함 덕분이기도 했다. 박 대리의 유전적 완벽함은 그에게 더욱 많은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무거운 의무를 부여했다. “성공”이라는 왕관은 화려했지만, 그 무게는 상당했다.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민준은 우연히 오래된 사진관 앞을 지나게 되었다. 사진관 창문에는 다양한 가족사진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 위에도 희미하게 연체료가 떠돌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미소 뒤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끊임없는 소비를 위한 노력들이 숨겨져 있었다 –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바래가는 행복이었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가족사진 속 행복조차도 ‘빚’으로 지탱되는 것이라는 것을. 사랑과 행복 역시 시간과 돈이라는 ‘빚’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네 번째 연체 알림 메시지가 도착했다 – 이번에는 단순한 문자 메시지가 아니라 희미한 시각적 잔상으로 나타났다. 버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위로 연체 알림 메시지가 번져나갔마치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 “더 많은 것을 소유하라! 더 많은 것을 소비하라! 너는 이 시스템의 일부다!” 메시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조롱하는 듯했다 . 메시지는 점점 커다란 괴물의 눈처럼 변형되어 민준을 삼키려 했다.. 괴물의 눈동자 속에는 그의 과거와 현재가 뒤틀려 있었고 미래는 더욱 불확실하게 보였다..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광고 이미지들이 괴물의 눈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민준은 숨을 죽였다 – 그는 이제 단순히 카드값을 못 내서 고통받는 회사가 아니었다.. 그는 현대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빚'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이미 깊숙이 '빚'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블랙홀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별들이 보였다 – 그것들은 아직 완전히 잠식되지 않은 인간의 따뜻함과 희망이었다.. 꿈속 괴물이 DNA PC에서 흘러나온 그의 불안과 욕망의 결정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리고 TV 채널을 돌리던 순간, 그는 새로운 단서를 발견했다: ‘TV에서는 DNA PC’라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찢어진 카드 명세서 조각들이 마치 검은 나비 떼처럼 흩날렸다. 김민준은 무릎을 꿇고 앉아, 명세서에 찍힌 8등급이라는 숫자를 노려봤다. 숫자는 단순한 경제적 지표가 아니었다. 그의 영혼에 새겨진 낙인이었고, 아버지의 낡은 사진 속 희미한 미소마저 삼켜버리는 어둠이었다. 중력이 더욱 강해진 듯, 그의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TV에서는 끊임없이 광고 모델들의 완벽한 미소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모두 1등급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행복을 독차지한 것처럼, 햇살 아래 피어난 탐스러운 꽃송이처럼 과장된 행복을 뽐냈다.


“TV에서는 DNA PC.” 민준은 중얼거렸다. 꿈속에서 보았던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지는 그의 DNA 속에 각인되어, PC 화면 속 자본의 흐름을 따라 움직였다. 그는 마치 거대한 데이터 스트림 속에서 길을 잃은 작은 입자 같았다. 그 입자는 과거 아버지의 꿈과 희망, 그리고 현재 그의 좌절과 불안까지 모두 담고 있었다.


점심시간, 회사 동료들은 최신 스마트폰과 명품 가방을 자랑하며 웃고 떠들었다. 민준은 그들의 활기 넘치는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완벽하게 연출된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들의 웃음 뒤에는 미묘한 불안과 경쟁심이 숨겨져 있었다. 높은 신용등급을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완벽함을 놓치지 않으려는 애씀… 그 모든 것이 불안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썼고, 그 증명은 결국 퍼스트뱅크가 발행하는 숫자에 달려 있었다.


연체 알림 메시지가 세 번째로 도착했다. 이번엔 단순한 문자가 아니었다. 환청처럼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더 빌려라! 더 소비하라! 너는 우리 것이다!” 메시지는 점점 커다란 그림자처럼 그의 주변을 휘감았다. 그는 숨 막힐 듯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마치 거대한 금융 괴물이 그의 영혼을 조금씩 빨아들이는 듯했다. 아버지의 정직했던 손등에 새겨진 주름마저도 연체료만큼 깊어져 보였다.


어느 날, 민준은 퇴근길 골목길에서 술에 취한 남자가 여성을 위협하는 것을 목격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연체로 쌓인 분노와 스트레스가 폭발하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주먹에 담긴 연체료는 남자의 몸을 잠시 얼어붙게 만들었다. 남자는 마치 조각상처럼 굳어버렸고, 민준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 퍼스트뱅크에게 빼앗긴 그의 에너지가 잠시 되돌아온 듯했다..


그때, 한 여성이 다가왔다. 그녀는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봤다. 그녀의 이름은 박서연이었다. 전설적인 해커이자 신용 1등급 능력자였다. 서연은 민준에게 ‘크레딧 파이트’라는 세계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 신용등급은 단순한 경제적 지표가 아니라 개인의 에너지 레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카드는 힘이다 전투력이다! "신용등급은 영혼의 무게와 같아요." 서연은 말했다. "높은 등급은 인정받는 영혼, 낮은 등급은 소외된 영혼이죠." 그녀의 눈빛은 마치 오래된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깊고 차분했다..


그녀는 민준에게 퍼스트뱅크를 소개했다 – 사이비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거대 금융 조직이었다.. ‘대출 권유’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과소비하게 만들고 ‘연체 바이러스’를 퍼뜨려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다.. 그들은 마치 신처럼 군림하며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다.. 서연은 퍼스트뱅크가 사람들의 신용 에너지를 흡수하여 ‘총재’의 불멸을 위한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빨아들여 자신의 힘을 키운다.. 총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불사의 존재이며 그의 눈물은 금으로 변한다..


"퍼스트뱅크는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블랙홀이야." 서연이 말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확장하고 있지." 퍼스트뱅크는 인간의 시간과 기억을 삼키는 거대한 모래시계였다..


민준은 퍼스트뱅크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목격하고 분노했다.. 그들은 마치 숙명처럼 다가와 사람들을 조종한다.. 세 번째 연체 알림 메시지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 "더 빌려라! 더 소비하라! 너는 우리 것이다!" 메시지는 이제 단순한 요구가 아닌, 오래된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퍼스트뱅크 본점 지하 금고는 사람들의 신용 에너지가 응축된 공간이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마치 거대한 심장 박동처럼 신용 에너지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절망, 욕망과 두려움을 실어 놓은 ‘빚’들이 촘촘히 쌓여 있었다.. 민준은 금고 안에서 타인들의 고통과 좌절을 생생하게 느꼈다 -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걸린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금고 안에는 희미한 향수 냄새가 감돌았는데, 그것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애환이 응축된 향기였다..


그때, 그의 눈앞에 기묘한 형상이 나타났다 – 금고 벽면에 희미하게 빛나는 숫자들, 그리고 숫자들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 그것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는 자신이 점점 더 깊숙이 ‘빚’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블랙홀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별들이 보였다 – 그것들은 아직 완전히 잠식되지 않은 인간의 따뜻함과 희망이었다… 별들은 때로는 아버지의 미소처럼 따스했고, 때로는 서연의 날카로운 눈빛처럼 강렬했다.. 민준의 할아버지는 퍼스트뱅크에게 삶을 빼앗긴 혁명가였다 - 그의 용기는 민준에게 유전되어 퍼스트뱅크에 대한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는 이제 단순히 연체료에 분노하는 것이 아닌, 조상의 한까지 이어받아 싸워야 할 존재임을 깨달았다..


손끝에 박힌 카드 명세서는 굳은살처럼 그의 기억을 짓눌렀다. 연체 알림은 이제 단순한 문자 메시지가 아니었다. 차가운 아침 이슬처럼, 혀끝에 닿는 커피의 쌉쌀함처럼, 미묘하게 일상을 잠식해왔다. 오늘은 특히 그랬다. 지하철 안 사람들 표정 위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연체료의 숫자들. 3,780원. 12,450원. 56,900원. 유령의 손길처럼 그들의 삶에 달라붙어 무게를 더했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세상 모든 것이 ‘빚’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사랑에, 사회의 은혜에, 심지어 숨 쉬는 공기에도 빚을 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퍼스트뱅크 지점 앞을 지날 때마다 느껴지는 압박감은 더욱 깊었다. 건물 유리창은 거대한 눈처럼 그를 응시했고,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돈이 흘러넘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이자 폭탄 능력을 시험 삼아 몇 군데 지점을 공격했다. 낮은 등급의 직원들은 잠시 얼어붙었지만 금세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탐욕이 뒤섞인 기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다음 ‘고객’을 노리는 눈빛이었다. 그들의 활기는 상처를 감춘 맹수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그날 저녁, 민준은 서연과 작은 술집에서 만났다. 서연은 늘 그랬듯 시크하고 냉정했지만, 그의 눈을 바라볼 때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너,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어.” 그녀는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분노만으로는 부족해. 분노는 불꽃이지, 지속적인 빛은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한 독약 같았다. 진실을 담고 있지만 삼키기엔 쓰라렸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의 말은 옳았다. 그는 단순히 퍼스트뱅크에 대한 분노만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발버둥치는 것일까? 그는 문득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늘 긍정적이었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살아갔다. 아버지의 불안은 마치 뿌리 깊은 나무처럼 퍼져나가 퍼스트뱅크의 덫에 걸려 삶을 빼앗겼다.. 민준은 아버지의 그림자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슬픔을 느꼈다. 아버지의 불안은 그의 유전자에 새겨진 숙명과 같았다.


술집 벽면의 TV에서 광고가 흘러나왔다 – ‘퍼스트뱅크, 당신의 꿈을 현실로!’ 화면 속 모델들은 환하게 웃으며 신용카드를 흔들었다. 하지만 민준에게는 그 미소가 조롱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웃음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술잔을 한 모금 마셨다.. 술맛은 쓰디쓰다.. 마치 갈라진 대지에서 피어난 꽃잎처럼,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맛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연체 알림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 "더 빌려라! 더 소비하라! 너는 우리 것이다!" 처음에는 문자 메시지였지만, 이제는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 목소리는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져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는 귀를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그의 영혼에 박혀 버린 듯했다.. 연체료 숫자는 점점 괴물처럼 변해갔다 - 입을 벌리고 그를 집어삼킬 듯 했다..


다음 날, 민준은 회사에서 더욱 투명해진 존재감을 느꼈다.. 팀장님은 그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동료들은 그를 피해 가는 듯했다.. 점심시간, 그는 혼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식판 위의 반찬들은 마치 그의 우울한 기분을 반영하듯 색깔이 바랬다.. 그때, 그의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갑자기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민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 “괜찮으세요?”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 “카드값이… 또 연체됐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그 순간, 민준은 그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 역시 퍼스트뱅크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고 위로했다 - “괜찮아요. 우리 모두 같은 빚더미에 놓여 있는 거잖아요.” 그의 말은 그녀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민준 자신도 완전히 위로받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거대한 거미줄에 걸린 또 다른 벌레일 뿐이었다..


저녁이 되자, 네 번째 연체 알림 메시지가 시각적 잔상으로 나타났다 – 길거리 간판, TV 화면, 사람들의 얼굴 위로 끊임없이 번져나갔다.. 이제 연체 알림은 단순한 통보를 넘어, 그의 주변 세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거미줄을 짜놓은 자는 바로 퍼스트뱅크였다… 도시 전체가 퍼스트뱅크의 거대한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이자 폭탄 능력은 단순히 힘만이 아니었다 -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곧 퍼스트뱅크를 향한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단지 복수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과 욕망에 대한 해방구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아버지의 불안과 자신의 고통을 담아낸 이자 폭탄으로 퍼스트뱅크를 공격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복수가 아닌, 존재론적 해방이었다... 이자 폭탄이 터질 때마다 인간은 조금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조금 더 인간답게 살아갈 것이다...


연체 알림 메시지가 이제 단순한 문자나 환청을 넘어, 피부에 스며드는 잉크처럼 온 몸을 휘감았다. 얇은 막이 씌워진 듯, 민준의 감각은 점점 무뎌져갔다. 세상의 소리는 점차 멀어져, 깊은 바닷속에서 듣는 듯 웅웅거렸다. 카페 안의 커피 향조차 희미해져, 희미하게 썩어가는 플라스틱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 그는 서연을 찾아 퍼스트뱅크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던 중,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에 몸을 돌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세 명의 남자가 서연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당황과 함께 희미한 체념이 어려 있었다.


“김민준, 8등급 주제에 뭘 그렇게 열심히 구경하나?”


남자들이 던진 조롱은 민준의 심장에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혔다. 그의 신용등급은 마치 그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낙인이 된 듯했다. 분노가 끓어오르자, 주변의 커피잔에서 희미하게 연체료의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서연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놓아줘! 서연 씨를!”


민준이 달려들었지만, 세 남자는 쉽게 그를 제압했다. 그들의 손길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납치된 서연과 함께, 민준은 검은 리무진에 실려 퍼스트뱅크 본점으로 향했다. 리무진 안은 고요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서연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부조리한 시스템에 복수해야 한다.


퍼스트뱅크 본점 지하 금고는 거대한 심장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수많은 신용 에너지가 응축되어 흘러넘쳤다. 마치 거대한 물고기 떼처럼 빛나는 에너지 입자들이 금고 안을 유영하고 있었다. 총재는 금고 중앙에 위치한 화려한 의자에 앉아 서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오래된 동전처럼 빛을 잃고, 서연을 저울질하는 듯했다.


“드디어 시간 정지 능력의 소유자를 손에 넣었군.” 총재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나의 불멸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그의 불멸 추구는 단순한 삶에 대한 집착일 뿐만 아니라, 고독과 불안에 대한 해소 수단이었다 - 시간의 흐름에 종속된 인간의 유한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총재는 서연에게서 신용 에너지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서연의 몸에서 빛이 점점 사라지고, 그녀의 표정은 점점 창백해졌다. 민준은 속수무책으로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연체료는 점점 더 무거워졌고, 영혼은 침묵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때, 그의 눈앞에 우주 은행의 마스코트인 황금 돼지가 떠올랐다 – 어딘가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 “최악의 빚을 질 기회다.” 황금 돼지의 목소리는 그의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울려 퍼졌다. 황금 돼지는 그에게 “네 존재 전부를 걸고 싸워봐!”라고 속삭였다.. 망설임 없이 민준은 계약에 동의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담보로 ‘궁극의 빚’을 진 것이다! 마치 심연 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그는 모든 것을 걸었다. 계약서에는 그의 생애 모든 순간들이 영상으로 기록되어 재생되고 있었다 – 웃음과 눈물, 사랑과 슬픔, 희망과 절망까지 모두 말이다..


순간, 그의 몸 안에서 거대한 힘이 폭발했다. 주변의 모든 에너지가 빨려 들어갔고, 금고 안의 빛깔이 검게 변했다. 그의 신용등급은 측정 불가능한 마이너스로 추락했고, 그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빚 블랙홀’로 각성했다! 이제 그는 세상 모든 ‘빚’을 빨아들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 그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주변 공간까지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시간이 느려지고, 공간이 늘어났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기억들이 파편처럼 부유하며 모든 것이 뒤틀렸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세상의 모든 빚을 담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마치 거대한 자석처럼 모든 ‘빚’들을 끌어당겨 새로운 공간-시간 연속체를 만들어냈다…


납치된 서연에게서 마지막 남은 신용 에너지가 빨려 들어가는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 복수는 단순한 감정 해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빚’을 가진 모든 이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투쟁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연체 알림 메시지는 이제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새로운 존재로 탄생시킨 각성의 신호였다… 마지막 연체 알림 메시지가 온 몸을 휘감으며 속삭였다 - "이제부터 시작이다." 온몸을 휘감는 연체 알림 메시지는 희미하게 썩어가는 플라스틱 냄새를 풍겼다 –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역겨운 향기였다


찢어지는 소리는 더 이상 카드 명세서가 찢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낡은 플라스틱은 침묵 속에서 울부짖으며 깨져나갔다. 뼈마디가 부스러지는 소리, 텅 빈 지갑에서 마지막 동전이 굴러나오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민준의 망막에 검은 균열로 새겨졌다. 연체 알림 메시지는 이제 그의 피부에 문신처럼, 그림자처럼, 불안정한 심장 박동처럼 따라붙었다. 썩어가는 플라스틱 냄새는 새로운 시대의 역겨운 향기였다. 일회용 포장재의 달콤한 독, 고급 포장지의 가짜 우아함, 그 모든 것이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그의 신용등급은 숫자로 정의될 수 없었다. 마이너스를 넘어선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무(無)의 영역으로 추락했다. 중력이 사라진 듯 몸은 가벼워졌지만, 영혼은 더욱 무거워졌다.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어봤다. 냉장고 속 김치, 책상 위의 먼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모든 사물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연체료의 잔상이 보였다. 세상 모든 존재가 ‘빚’이라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걸려 발버둥치는 모습이었다. 단순한 돈의 빚만이 아니었다. 과거로부터 받은 영향, 미래에 갚아야 할 책임, 잃어버린 시간과 깨어진 꿈까지, 모든 것이 ‘빚’이었다.


능력 각성 후 처음 맞이하는 아침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그는 예전의 김민준과 닮아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색으로 변했고, 피부는 창백하게 빛났다. 그는 조각상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삼킬 듯한 불안정한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인간과 괴물의 경계에 선 존재였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그의 ‘빚’은 끊임없이 반복될 듯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반복을 끊어낼 힘을 얻었다.


블랙홀 능력은 주변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하고 왜곡시켰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동료들의 활기 넘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그들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고 활력은 떨어져 나갔다. 컬러 TV가 흑백으로 변하는 듯, 세상의 색깔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민준은 자신의 능력이 단순한 힘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감각임을 깨달았다. 그들의 ‘빚’은 그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더욱 무겁고 진하게 느껴졌다 - 마치 오랜 시간 숙성된 와인처럼 말이다.


“김 대리님, 오늘 회의 자료는 언제쯤 준비되나요?” 팀장 박철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민준은 그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연체료 잔상을 바라봤다 – 검은 구름처럼 그의 인생을 가로막고 있었다. 박철수 역시 퍼스트뱅크의 빚에 시달리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민준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지만 미묘한 압박감이 실려 있었다 – 마치 박철수의 카드 한도를 조금 줄여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박철수는 순간 숨 막히는 듯 느꼈다. 그는 늘 자신보다 조금 더 풍족했던 동료들을 질투했다.


점심시간, 민준은 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아직 총재에게 납치된 상태였다. “서연아, 괜찮아?”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민준아.” 서연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하지만 총재는 내 시간 정지 능력을 완전히 흡수하려고 해… 조금만 더 버텨봐.” 그녀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 그녀의 시간마저 곧 멈춰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총재는 단순한 힘을 탐내는 것이 아니었다 – 서연의 시간 정지 능력 안에 담긴 ‘가능성’을 탐내고 있었다..


그때, 연체 알림 메시지가 다시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너는 이제 영원히 우리 것이다." 그 메시지는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새로운 존재로 탄생시킨 각성의 신호였다... 그는 이제 세상 모든 ‘빚’을 빨아들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힘은 이제 그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그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퍼스트뱅크 본점 지하 금고로 향했다… 그곳에는 총재와 수많은 신용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할 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최악의 빚’으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 ‘최악의 빚’이야말로 그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들어 줄 초능력인 것을…. 퍼스트뱅크는 단순한 은행이 아니었다 – 현대인의 욕망과 불안을 먹고 자라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그들은 신용 시스템을 통해 개인들을 통제하고 착취하며 끊임없이 ‘빚’을 만들어냈다.. 민준은 그 괴물을 쓰러뜨리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빌려주는 공동체 기반 금융 시스템 말이다..


지하 금고로 향하는 복도는 마치 거대한 혈관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벽에는 빛바랜 가족사진과 성공한 사업가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 모두 퍼스트뱅크의 고객들이었다.. 민준은 그들의 사진 속에서 희미한 미소를 읽어냈다.. 그들은 행복했을까? 아니면 퍼스트뱅크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였을까? 민준은 자신의 블랙홀 능력을 사용하여 그들의 ‘빚’을 빨아들였다 – 그것은 마치 오래된 먼지를 쓸어내는 것처럼 가벼웠지만 동시에 무거웠다..


금고 문이 열리고 눈부신 황금빛이 쏟아져 나왔다.. 총재는 황금 왕좌에 앉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신용 에너지가 회오리치며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드디어 왔군, 김민준." 총재는 나지막이 말했다.. "네 '최악의 빚'으로 내 '최고의 신용'에 맞설 용기가 있나?" 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최악의 빚'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힘이야." 그는 두 팔을 벌려 블랙홀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금고 안의 모든 신용 에너지가 그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은 잠시 숨을 죽였다….


금고 안의 빛은 단순한 황금빛이 아니었다. 액체 크롬처럼 흘러내리는 빛은, 한때 인간의 꿈과 희망을 담았던 카드들의 홀로그램 잔상들이었다. 응축된 시간의 파편, 잊혀진 약속과 희미해진 미소들이 빛 속에서 춤을 추었다. 민준은 그 빛 속에서 자신의 연체 알림 메시지들을 보았다. 처음엔 단순한 문자였던 그것들은 이제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세상 모든 빚이 그의 눈동자에 새겨진 듯했다.


“네 ‘최악의 빚’으로 내 ‘최고의 신용’에 맞설 용기가 있나?”


총재의 목소리는 금고 전체를 울렸지만, 어딘가 공허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소유했기에 진정한 갈증을 잊은 채, 자신의 완벽함을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존재였다. 그의 완벽함은 오래된 시간의 화석처럼, 수많은 희생 위에 쌓아 올린 것이었다. 민준은 총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 속에는 만족과 함께 미묘한 불안이 숨어 있었다. 높은 신용등급은 곧 완벽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고, 그 완벽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동반했다.


“내 ‘최악의 빚’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힘이야.”


민준의 말에 총재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세상은 늘 그래왔다. 가진 자는 더 갖고, 없는 자는 더 없어져 간다. 너의 ‘최악’은 그 흐름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민준에게 속삭였다. “네 고통도 우리의 완벽함에 기여할 수 있다.”


민준은 두 팔을 벌렸다. 블랙홀 능력이 발동하며 금고 안의 공기가 점액처럼 스며들었다. 빛나는 황금빛이 빨려 들어갈 때, 민준은 마치 거대한 심장이 터져나오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의 몸 안에서 연체료가 아닌, 삶의 모든 무게가 응축된 검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빛줄기들이 맥박처럼 뛰어나오며 금고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소용돌이는 단순한 흡수 이상의 것을 보여주었다. 총재의 신용 에너지가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그의 과거가 민준에게 흘러 들어왔다. 화려한 파티, 성공적인 투자, 냉혹한 계약들… 그의 삶은 마치 잘 짜여진 드라마 같았다. 하지만 그 드라마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좌절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거대한 거미줄의 중심에 앉아 사람들의 삶을 빨아먹으며 자신의 풍요를 누려왔다.


총재의 신용 에너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꿈과 열정, 그리고 절망과 한숨이 응축된 정수였다. 민준은 그 에너지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꼈다. 연체료 때문에 밥을 거르는 아이, 직장에서 짤린 가장, 희망을 잃어버린 노인… 그들의 얼굴들이 블랙홀 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랐다.


블랙홀 능력은 마치 거울처럼 타인의 고통을 비추었다. 민준은 자신이 단순히 카드값을 연체해서 나락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현대 사회 시스템 속에서 소외된 모든 이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의 ‘최악의 빚’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였다.


총재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의 신용 에너지가 빠르게 줄어들수록,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멈춰라! 네놈의 하찮은 빚으로 감히 내 신분을 넘보려 하다니!”


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내 빚은 하찮지 않아. 내 빚이야말로 세상 모든 이들의 빚이지.”


블랙홀 능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금고 안의 황금빛이 점점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았다.. 어둠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신용등급이 더 이상 숫자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의 무게이자, 세상과의 연결 고리였다.. 그는 이제 단순한 회사원 김민준이 아니라, '최악'이라는 이름으로 각성한 새로운 존재였다.. 블랙홀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사건들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총재의 어린 시절, 첫 번째 투자 실패, 냉혹했던 아버지와의 갈등… 민준은 총재의 과거를 통해 그의 욕망과 불안감을 이해하게 되었다..


블랙홀 주변으로 희미하게 연체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전과는 달랐다.. 그것들은 더 이상 조롱이나 위협이 아니었다.. 총재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메시지는 "포기해라! 너는 어차피 우리 손안에 있다!" 가 아니라 "너도 우리처럼 완벽해질 수 있다!" 라고 속삭였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따뜻하고 위로하는 듯 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메시지는 속삭였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민준은 손을 뻗어 빛바랜 사진 한 장을 잡았다.. 사진 속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웃고 있는 총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는 총재에게 물었다.. “당신의 완벽함 뒤에 숨겨진 고독도 느껴지지 않습니까?” 총재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완벽함이라는 갑옷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찢어진 사진 조각 사이에서 아버지의 미소는 희미한 빛깔로 번져 나왔다. 총재의 완벽하게 다려진 슈트, 아버지의 약간 낡은 와이셔츠. 대비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마치 잘 짜여진 연극 무대 위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배우 같았다. "당신의 완벽함 뒤에 숨겨진 고독도 느껴지지 않습니까?" 민준의 질문은 총재의 완벽한 가면을 살짝 흔들었다. 그 균열은 마치 얼음판 아래 숨겨진 심연처럼, 작은 떨림으로 퍼져나갔다.


총재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침묵은 권력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다. 그는 고독을 즐기는 듯했다. 고독은 그에게 선택이자, 방어막이자, 영혼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연금술사의 불이었다. "고독은 완벽함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8등급 인간에게 무슨 고독을 알겠습니까?" 그의 말은 민준의 심장을 가볍게 찔렀다. 8등급의 무게는 단순한 경제적 지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빚, 감정의 빚, 존재의 빚까지 규정하는 굴레였다. 아버지에게 갚아야 할 시간의 빚이, 총재에게 더욱 강하게 맞서는 원동력이 되었다.


연체 알림 메시지가 그의 시야에 떠올랐다. 이전과는 달랐다.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흑백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번져나갔다. 메시지는 이제 그의 기억과 현실을 뒤섞어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미납 금액: 당신의 행복, 당신의 미래, 당신의 영혼'. 메시지는 조롱처럼 울려 퍼졌다. 마치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연체료처럼 느껴졌다. 그 연체료는 과거의 선택들, 놓쳐버린 기회들, 그리고 아버지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사랑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퍼스트뱅크 본점 지하 금고는 거대한 심장 박동처럼 맥동쳤다. 사람들의 신용 에너지가 응축된 공간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황금빛 에너지 줄기는 마치 거대한 혈관처럼 금고 안을 휘감아 흐르고, 그 빛줄기 위로 사람들의 희망과 절망이 마치 작은 물방울처럼 반짝였다. 어둠 속에서는 끊임없이 그림자들이 춤추고 있었다. 민준은 블랙홀 능력으로 금고 안을 탐색했다. 모든 사물에는 보이지 않는 ‘빚’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화려한 카펫 밑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좌절이, 반짝이는 금화에는 욕망과 질투가 응축되어 있었다.


시간은 느려졌다, 혹은 왜곡되었다. 블랙홀 능력은 주변 공간을 휘감아 시간의 흐름마저 삼켜버리는 듯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환영이 펼쳐졌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웃던 기억, 직장에서 무시당하던 순간, 서연과의 설레는 만남들을 동시에 경험했다.. 마치 거대한 시계 바늘이 멈춰버린 듯, 모든 것이 정지된 듯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어야 했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총재는 민준을 향해 차갑게 미소지었다. 그의 눈에는 오랜 세월 동안 흡수해 온 수많은 영혼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는 완벽함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불안감을 해소했다.. "자네는 흥미로운 존재군.. 하지만 어차피 내 손안에 있을 존재일 뿐이야." 총재는 손을 뻗어 민준의 영혼을 빨아들이려 했다.. 그의 손길은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동시에 뜨거운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준은 블랙홀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에너지 파도는 금고 안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빛줄기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그림자들이 격렬하게 춤췄다.. 총재는 잠시 휘청거렸지만 곧 다시 균형을 잡았다.. 그의 완벽함이라는 갑옷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네 능력이 조금 특별하긴 하군.” 총재는 비웃듯 말했다.. “하지만 결국 내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손짓 하나로 민준을 압도하려 했다.. 민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는 아버지의 미소를 떠올렸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하고 정겨운 미소였다.. 그 미소는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빚’ - 연체료, 좌절감, 소외감 - 을 블랙홀 능력에 담아 총재에게 쏟아부었다… 아버지에게 빌린 시간과 사랑까지 모두 담아서…


총재는 비명을 질렀다! 검은 에너지 파도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완벽한 슈트가 갈라지고, 그의 완벽한 가면이 벗겨졌다… 그 안에는 수많은 영혼들의 고통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총재는 서서히 소멸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줄기는 수많은 다른 영혼들과 합쳐져 새로운 차원의 의식을 형성했다… 그 의식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마치 새로운 역사의 시작처럼…


마지막 연체 알림 메시지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침묵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움트는 듯했다... 민준은 깊게 숨을 쉬었다... 그의 영혼은 한층 더 무거워졌지만 동시에 자유로워졌다… 그는 이제 세상 모든 ‘빚’을 책임져야 하는 새로운 ‘신’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신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존재가 가진 시간의 빚과 감정의 빚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신이었다… 그는 고독했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는 이제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빚'들을 끌어안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었다. 그 '빚'들은 단순한 경제적 손실만이 아니었다 – 삶 속에서의 희생과 타협,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쌓이는 존재론적 무게였다…. 새로운 별자리가 밤하늘에 빛났고 , 그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식이 아니라 , 민준이 책임질 미래를 상징하는 표식이었다….


우주 은행의 메시지가 귓가에 울렸다. “채무 승계가 완료되었습니다. 전임자의 빚을 떠안은 당신이 이제 이 세계의 새로운 ‘신’입니다.” 민준은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은 이전보다 더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빛마저도 그의 새로운 빚에 잠식당한 듯했다. ‘신’이라니. 카드값 연체로 시작된 그의 여정이 이렇게 초월적인 지점까지 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그의 발 밑에는 깨진 카드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과거의 민준, 8등급의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 김민준의 잔해였다.


새로운 힘은 마치 무형의 중력처럼 그를 감쌌다. 세상의 모든 ‘빚’이 그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단순한 화폐적 가치 이상의 것들이었다. 실연의 아픔, 잃어버린 꿈, 뒤늦게 깨달은 후회, 부모님과의 작은 다툼… 모든 존재가 지고 살아가는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 그의 가슴 속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이제 개인의 고통을 넘어, 우주의 근원적인 불안감을 대변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 불안은 오래된 먼지처럼, 모든 존재의 표면에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디지털 액자 속 가족사진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어머니의 미소는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아버지의 눈빛은 늘 그랬듯 야무졌지만, 그 안에 숨겨진 고독이 느껴졌다. 그는 가족들의 ‘빚’도 느낄 수 있었다 – 서로에게 보여주기 위한 완벽한 모습 뒤에 감춰진 작은 갈등과 상처들. 그것은 마치 완벽하게 짜여진 드라마 세트처럼, 아름답지만 어딘가 불안정한 풍경이었다. 그들의 행복은 유리 조각처럼 섬세했고, 언제든 산산이 부서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딸아이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몇 년째 야간 택시를 몰았고, 그 피로가 미소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고독은 젊은 시절 꿈을 포기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시간들의 무게였다.


새로운 세상은 예상보다 더 복잡했다. 단순히 신용 점수를 매기고 돈을 빌려주는 시스템만 바꿔서는 부족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했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갈망했다. 그들의 욕망은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고, 그 결과는 또 다른 ‘빚’으로 이어졌다. 그는 시스템을 리셋해야 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완벽한 해답은 없었다. 그는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듯, 끊임없이 길을 찾아야 했다. 그의 앞에는 무수한 갈림길이 펼쳐져 있었고, 각 길마다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연체 알림 메시지가 떠다녔다온전히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의 새로운 능력의 증거였다. 그는 손을 뻗어 메시지를 잡아당겼다. 메시지는 종이비행기처럼 접혀 그의 손 안에서 반짝였다. 그것은 마치 기억처럼, 희미하지만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 박선영이라는 이름, 그녀와의 짧았던 사랑과 헤어진 후 남겨진 카드값 덩어리... 사람들은 여전히 스마트폰에 매달려 쇼핑을 즐겼고, SNS에 완벽한 자신의 모습을 과시했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지만, 그들의 눈 안에는 미묘한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경쟁의 흔적이었다..


그는 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카페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직장인, 친구와 수다를 떠는 학생들… 그들의 ‘빚’은 각기 달랐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돈? 명예? 사랑? 아니면 단순히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작은 위안일까?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직장인은 다음 휴가를 기다리며 현재를 버텼고, 사랑에 빠진 연인은 영원할 것이라 믿으며 현재를 즐겼다.. 학생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불안과 기대를 동시에 품었다..


그때 그의 눈에 한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구수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빚’은 깊고 오래되었지만, 어딘가 평온함이 느껴졌다 – 삶의 무게를 겸허히 받아들인 듯했다.. 그 노인의 얼굴은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고목나무 같았고 , 그의 눈빛은 깊은 우물을 닮아있었다.. 민준은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노인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 “삶이란 원래 빚덩어리이지 않겠나? 중요한 건 그 빚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거지.”


노인의 말에 민준은 깊은 영감을 받았다 – ‘빚’이란 단순히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고 ,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이제 단순하게 ‘빚’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 ‘빚’을 활용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했다.. 마지막 연체 알림 메시지가 그의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은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노인의 말에 잠긴 민준은 곧 첫 번째 실험에 착수했다.. 그는 연체 알림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에게 '시간'을 담보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신용 시스템을 제안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미래에 사용할 물건이나 서비스와 교환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사람들도 점차 시간 화폐 시스템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 시간 절약형 상품들이 인기를 얻었다 . 그리고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욱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하고 계획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


그는 다음 단계로 '감정 공유 시스템'을 구축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위로받거나 공감하며 '감정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기쁨을 가진 사람들과 감정을 교환하며 위로받았고 , 외로운 사람들은 따뜻한 공감을 통해 안정을 찾았다 . 감정 공유 시스템은 사회적 연결망을 강화하고 인간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


하지만 변화에는 항상 저항이 따랐다 . 기존 금융 시스템의 거물들은 시간 화폐 시스템과 감정 공유 시스템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생각하고 민준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가했다 . 또한 일부 사람들은 시간 화폐 시스템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 감정 공유 시스템이 사생활 침해라고 비판했다 . 민준은 끊임없이 설득하고 협상하며 난관들을 헤쳐나갔다 .


새로운 세상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있었다 .. 거리에는 연체 알림 메시지 대신 시간 화폐 광고판들이 번쩍였고 , 카페에서는 감정 공유 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민준은 새로운 신용등급 시스템 도입 후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 이전보다 훨씬 편안하고 희망찬 표정들이었다 .. 그는 새로운 도시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 그곳에서는 시간 화폐와 감정 공유 시스템 덕분에 더욱 효율적이고 인간적인 도시가 건설되고 있었다 . 하늘에는 밝게 빛나는 별들이 유난히 아름답게 보였다 . 별들은 마치 그들의 새로운 세상을 축복하는 듯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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