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시간, 가버린 사랑은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현재 진행형
달콤 쓸쓸한 봄날은 가고, 당신의 6월은 어떠한가요?
아열대 폭염으로 걸어 들어가 후덥지근 땀방울에 지쳐 가는 6월, 장대폭우가 '쏴아아~ 후드득!' 순식간에 쏟아져 우산 없이 쫄딱 비 맞았지요. '봄날은 떠나갔으니 정신 바짝 차려!' 말하듯 초여름 소나기가 온 세상 비를 끌어모은 듯 사정없이 퍼붓고 흘러넘쳐, 내 안경렌즈로 보는 세상은 비 오는 날 수채화로 묽고 흐려집니다.
의리 없는 계절의 흐름에 대책 없어 우울한 마음이 소나기가 뿌린 죽비에 화들짝 얻어맞고 저의 여름날은 시작되었지요. 천둥 치는 장맛비 속을 걸으며 젖은 청바지에 하얀 운동화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 순간 장맛비가 내리면 주저 없이 비 쫄딱 맞으며 빗속을 달리던, 시간 속으로 사라진 내 스무 살의 청년이 추억 속에서 클로즈업(Close-up)돼 되살아납니다.
폭우를 뚫고 동해선 기차로 달려 고래를 만날 거라고, 휴전선까지 걸어가 보리라 시를 쓰던, 짙은 눈썹에 장발의 머리카락 청년 모습이 기억의 서버(Server)에서 튀어나와 깜놀(깜짝 놀람)했지요.
군부독재에 엎드려 바깥세상을 알 길 없어 답답하던 1987년 여름날 겨우 경험한 낭만이란, 도서관을 뛰쳐나와 대자보를 읽고 고민하던 캠퍼스, 학교 앞 습기 찬 지하의 예술영화관, 전공 서적 맡겨 두고 외상술에 통기타치며 포장마차에서 죽치는 일이었죠.
오오~ 고맙게도 이번 마수걸이 장맛비가 대학생이 값비싼 술과 안주 말고는 다 향유하던, 학교 앞 별이 빛나던 여름밤 가난한 국립대 학생들의 낭만포차로 쓰윽~ 데려다줍니다.
장맛비의 기세에 떠밀려 가버린 봄날이 아쉽긴 해도, 계절의 변화는 잊힌 추억을 회생시켜 주는 멋진 마법사이군요. 봄날이 가지 않았다면 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몰랐을 테니까요. 계절과 사랑이 떠났을 때 비로소 기쁜 우리 젊은 날이었음을 깨닫는, 불안정한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임을...
집으로 돌아와 비 맞은 멜랑콜리(Melancholy) 기분을 놓기 싫어 노트북을 열고 그 시절 8090 앙코르 영화 한 편을 기어코 찾아냅니다. 당시 20세기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영화감독으로 추앙받은 배창호 감독과 안성기/황신혜가 배우의 연극 같은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뻔한 설정의 러브 스토리이지만, 조건 없는 순애보에 설레고 여주인공의 죽음에 한 없이 슬픔에 빠져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음에 다시 놀랍니다.
"저···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차나··· 한잔··· 같이 할까 해서요···."
안경 낀 청년의 이 대사는 새로운 만남을 시도할 때 시작하는 시그니처(Signature) 인사말이 되었지요. 영화를 보고 나와 극장 건너편 안경원에 들어가 "영화 포스터의 안성기 배우 뿔테와 같은 안경 있나요?" 주인공처럼 소심하게 묻고 새 뿔테 안경을 새로 장만했었지요.
새로운 만남이 지속되기 위하여 누군가가 기뻐하도록 먼저 사이다와 삶은 계란을 제공하며 배려하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 다가가지 않고 기다리는 사랑은 기쁜 우리 젊은 날이 될 수 없다는 것임을···. 노트북을 덮으며 '과연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가?' 실존적 질문에 답이 무얼까 생각해 봅니다.
한 장의 수채화 그림 같은 사랑이 막을 내리면 또다시 새로운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 오늘이 막막하고 기막히고 답답하여도 사이다와 계란을 나눌 주변을 찾아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것. 누군가가 나에게 기쁨을 줄 것을 기대하기보다 여름날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 하자며 손 내미는 용기야말로 기쁜 우리 젊은 날로 가는 티켓 아닐까요?
[기쁜 우리 젊은 날의 러브 레터]
그대가 생명과 같은 사랑을 원한다면
난 그대를 사랑하지 않겠네
생명은 단지 한숨과 같은 것이니까
그러나···
그대가 영혼과 같은 사랑을 원한다면
난 그대를 사랑하겠네
왜냐하면 영혼은 영원한 것이니까
사랑하는 이와 사별한, 절대 기쁘지 않은 이야기가 왜 '기쁜 우리 젊은 날인가?' 반문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유한하며, 언젠가 막을 내리는 것이지만 새로운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 삶은 시간과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그러한 생이 지속되려면 상대가 기뻐하도록 손 내밀고 이끌어 줄 때 비로소 기쁨도 젊음도 현재 진행형이 된다는 것.
다음 주말 딸의 생일날이 오면 꽃 한 다발과 칠성 사이다에 빨대를 꽂고 삶은 계란 까서 선물해 보려 합니다. 그런데··· '기쁜 우리 젊은 날' 장면처럼 딸아이가 안 먹는다고 거절하기를 은근히 기대해 봅니다. 그러면 영화 장면처럼 뿔테 안경을 끼고 사이다와 계란을 까먹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저···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차나··· 한잔··· 같이 할까 해서요···."
우리 기쁜 젊은 날 이 한 줄 대사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