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끓는 도가니 속 같다고 느껴졌던 지난 여름, 마음 속에 담긴 잡다한 복잡함을 버리러 여행을 떠났다. 많은 것을 버리러 떠난 여행이었지만,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훅~하고 느껴지는 내 일상의 공기는 나를 여전히 그자리에 서있게 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식지 않고 끓고 있는 도가니 속에서 삶아지고 있었다.
'시름은 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이라, 집을 떠나도 시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안다.'고 했던 에세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떠날 수 없다면 잊어버리자는 마음에서 무언가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내 손에 들려진 책이 바로 이 책 '도가니'였다.
한 상자 가득 담겨 배송되어온 책들 중에서 선택하게 된 '도가니'는 공지영이라는 작가의 비중과, 표지에서 느껴지는 몽환적인 신선함, 그리고 어쩐지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의 강렬한 제목에 대한 이끌림 덕분이었다.
내 머릿 속의 도가니를 잠재우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던 책.
그러나 실은 읽어갈수록 소설이 주는 무게가 얹어져 나는 점점 더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안개의 도시 무진. 안개 속이기에 은밀한 비밀들이 곳곳에 산재해있을 것 같은, 그 깊은 가운데에 자애학원이 있다. 청각장애인들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자애학원, 그럴듯한 포장지에 싸여진 그 곳에서 벌어지는 분노할 사건들이 기간제교사로 부임한 강인호와 함께 서서히 안개속에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족의 평온한 미래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며 선택한 자리는, 강인호에게 또다른 갈등을 제공한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자애학원 관계자들의 횡포와 아동 성폭행, 인권 유린 등을 목격하게 되면서, 인권운동센터의 간사인 선배 서유진과 함께 사실 규명을 위한 선봉에 서게 된다. 그러나 결코 현실은 녹록치 않은 법...사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힘과 돈과 정치에 눌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힘있는 자가 원하는대로 사건은 해결되어 간다.
내면 속에 꾹꾹 눌러 재워두었던 과거의 사실들까지 적나라하게 파헤쳐지면서 궁지에 몰리게 된 강인호도 결국은 또한번 현실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그 누가 강인호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나마 남아있는 양심을 지키려 애썼던 것을...
강인호는 어쩌면 우리 시대 대표적인 인간상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일수도 있고, 어쩌면 너일수도 있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운다는 소설 속 서유진의 말이 머릿속에 뱅뱅 맴돈다.
안개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는 책표지의 말처럼, 세상은 늘 끓어오르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다.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사람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하고,정나미가 떨어지는 그만큼 인간에 대한 경외같은 것이 내안에서 함께 자란다는 작가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어본다.
그래도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아직 살만한 것을...
이젠, 끓는 내 삶속에서 난 어떤 식으로 살아야할지를 궁리해야겠다.
(2009년 리뷰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