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 마실 생각을 해
사람의 감성이란건 왜 밤만되면 스믈스믈 기어나와서 기껏 감춰놨던 마음까지 간지럽힐까? 누군가 다정하게 말만 건네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밤. 오늘은 나이트 근무(나이트 근무시간: 밤11시~다음날 새벽 7시)를 시작하는 날이다. 왜 나는 별 짓을 다해봐도 낮밤을 이렇게나 정확히 구별해버리는 예민한 생체시계를 가진 것일까? 암막커튼에 귀마개정도면 낮이여도 꿀잠을 잔다는 다른 간호사들이 부럽다. 나이트 출근 날만 되면, 널스케입에서 상근직 채용정보를 엄청 뒤졌던 기억이 난다. 3교대를 피하고 싶었다. 간호사가 된 것이 후회스러웠다.
똑같은 8시간의 근무더라도 '데이,이브닝,나이트'가 같은 무게로 다가오진 않는다. 나에게 '나이트 근무'란 마치 눅눅한 크래커와 같아서, 배가 왠만큼 고프더라도 먹기 싫은, 바로 쓰레기통으로 내던지고 싶은, 그런 느낌의 듀티였다.
게다가 피로는 왜 이리도 솔직하게 피부에 그려지는건지, 거울을 보니 오늘따라 모공도 더 커보인다. 이렇게 수면패턴이 엉망이다간 내 몸의 면역시스템이 마구 뒤엉켜 어디 하나 고장날 것 같다는 겁도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동 간호사라면 피하기 어려운 나이트 근무, 아닌 케이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간호사들이 이것으로 정붙인 병원을 떠난다. 일이야 배우면 늘겠지만, 나이트는 할수록 힘들다는 말을 하는 선생님들이 참 많았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건 역시 내 자신아니겠는가? '나이트'를 떠올리기만 해도 힘이 부치거나, 심지어 눈물이 날 정도라면 더이상 힘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는가? 아시다시피 간호사의 길은 다양하다. 당신은 공무원도, 교직이수를 했다면 보건교사도, 연구간호사도, 제약회사 간호사도 될 수 있다.
그만두고 싶다고 털어놨는데, 여자 월급으로_왜 요즘같은 시기에 그냥 월급이 아니라 '여자'월급이라 강조해서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_한 달에 300~400 벌 수 있는 직장이 생각보다 별로 없으니 더 참아보라고 주변 사람들이 말리더라도 그 말에 억눌릴 필요는 없다. 대형병원이라는 타이틀이 결혼시장에서 잘 먹어주니, 결혼 전까지는 참아보라는 당신! 제 남자친구는 아직 결혼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도망치는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한 일본드라마의 제목처럼, 버틸 수 있을만큼만 애쓰는 것도 필요하다. 절대 그만두면 안되는 직업이란건 없다. 내 참을성을 넘는 한계가 온다면 도망갈 줄도 알아야 하는거다.
하루에 2시간도 못자는 나이트 근무를 5년 정도 악을 쓰고 버틴 결과, 통장에 돈은 꽤나 쌓였지만 건강은 상당히 망가졌다.
나이트 정규 근무시간은 11시부터지만, 신규간호사이기에 10시에는 간호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루틴잡을 하기 시작했다. 병동 기본 물품 및 CPR 카트 안 물품까지 싹 카운트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EMR화면을 바라보며 내가 병동에 없던 동안 환자들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꼼꼼히 파악한다. 어느정도 이 일이 마무리되자, 이브닝 근무(이브닝 근무시간: 오후3시~오후11시) 선생님들의 얼굴이 한명 한명 눈에 잡히며 그들의 일상적인 대화도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곧 퇴근이라 그런지 텐션이 꽤 높아보인다. 출근할때 그 어두운 표정과의 대비감이 놀랍다. 사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저렇겠지. 나도 마찬가지일테고. 그나저나 당췌 이 3교대 근무를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나갈 수 있는걸까?
물론, 연차가 높다는 것이 일을 잘한다는 뜻은 아니다. 올드 간호사는 시간이 만들어주는 것이다. 연차가 턱밑까지 잔뜩 쌓인 경력 간호사들은 대부분 다른 병동으로 로테이션된다. 그리고 밑으로 신규간호사가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병동 내 서열이 상승하게 된다. 위의 두 명은 비슷한 연차이지만, 확실히 업무능력에는 차이가 있다는 걸 신규인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한 것 같지만, 나이트 근무에도 물론 장점은 있었다. 밤샘근무를 하는 직원들에 대한 서비스 혹은 복지와 같은 느낌으로, '야식'이 병동까지 배달된다. 보통은 갈색 도시락통에 쌀밥 한가득, 계란후라이나 김치, 햄 정도 담겨있는 것이 전부이지만, 탕비실 장 안에 있는 라면까지 추가하면 꽤 그럴듯한 한상차림이 된다. 30분 정도는 앉아서 쉴 수 있다는 점도 굉장히 매력적. 특별한 이벤트만 없으면 업무강도도 데이나 이브닝 근무보다는 확실히 낮다.
라면을 호호 불고 있는 옆 팀의 선생님 피부가 왠지 평소보다 주름져보인다. 이 병동에서만 10년차. 굉장하다 생각된다. 새벽감성에 젖으면 용감해지는 법. 선생님께 뜬금없는 질문 하나를 던져 보았다.
"선생님, 어떻게 3교대를 10년이나 버티신거예요?"
"응? 갑자기 무슨말이야? 그냥 다니는거지 별 이유는 없어."
식은 라면을 후루룩 입에 넣는 선생님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애송이에게 니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안다는 표정을 지으시곤 다시 입을 여셨다.
"너도 봤을지 모르지만, 난 출근할때마다 커피 한 잔씩을 사. 매일 사면 이것도 꽤 돈이기는 한데, 고생하는 나를 위한 작은 보상이라고 생각해. 그 커피 한 잔을 마실 생각으로 다른 생각은 다 집어넣고 진짜 '그냥' 출근해. 너 힘들지? 생각 같은거 하지마. 직장은 생각없이 다녀야 오래 있을 수 있어."
이 말이 정답은 아닐 수 있겠지만, '일을 한다'는 것을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편해지는 비결이라고 말하고 싶으셨던 것 아닐까? 다른 잡생각은 싹 접고, 내 입에 딱 맞는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시러 가자는 생각 정도로 출근길이 더이상 힘들지 않을 순간이 나에게도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