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간호사 Jun 24. 2020

9. 이건 벌금일까, 갈취일까?

쌩돈 이만칠천원

일을 시작한지 벌써 여섯달째. '1년 버티기' 목표의 절반은 성공한 셈. 여전히 능력 밖의 과중한 업무에 하루에 10시간은 넘게 공복으로 후달리고도 '나머지 일'이 쌓인 죄인으로 뒷 턴 선생님께 개미소리로 인계를 하지만. "이건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업무량이 아니야!!"라는 좌절감으로 얼굴을 숙인채 젖은 양말로 퇴근하지만.

그래도 좋은일도 있다. 이제 루틴잡은 나름 손에 익은 것도 같고, 무엇보다 곧 이 곳으로 동기 한 명이 배정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야, 나도 이제 병동 동기가 생기는 구나!!


어디서 전해들었는지, 새로 올 신규 간호사의 신상을 줄줄 꿰면서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나도 한 때는 저렇게 모두의 입에 올라 조근조근 뒷얘기가 돌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섬뜩했지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이곳에 와서 깨달은 사실 하나는, 사람들은 남 얘기 하는걸 너무 너무 너무좋아한다는 것. 그것이 안 좋은 이야일수록 더욱 더.


일터에서 만나, 서로의 사생활이나 속마음을 그대로 내비치기에는 아시다시피 상당히 높은 리스크가 뒤따른다. 사회에서 처음 만난 너와 나의 관계가 그렇게 공고하지 않을 뿐더러, 'A'라고 말한 것이 'A가 아니다.혹은 B이다.'로 전달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어디보다 말많은 동네가 바로 여기 아니겠는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얼른 선생님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욕심에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대기도 하고 올드 선생님께서 한마디만 툭 던지셔도 리액션 빵빵하게 방긋거렸었지만,  프리셉터 선생님으로부터 "어떻게 돌지 모르는 말, 덜하는 편이 낫다. 말 수 줄여라."고 조언들은 이후에는 나름 수다스러운 내면을 감추고 병동에 있는듯 없는듯한 존재를 목표로 조용 조용히 지내고 있다.


내 얘기 떠벌리기는 부담스럽고, 심심풀이가 목적이든 친목이 목적이든 입은 털어줘야 할 때 그럼 어떻게 할까?



정답은, 뒷담화.


다른 사람 이야기, 특히 그것이 '험담'일수록 사람들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리곤 했다. 그렇다면 주로 누가 욕을 먹을까? 바로 혹시 그 사람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간다 치더라도 내가 별로 큰 타격을 받지 않을만한 먹이사슬의 가장 바닥에 있는 사람. 즉, 신규나 저연차인 간호사가 화제의 대상이 되기 쉽다. 지금 이 순간 병실을 돌면서도 여러가지 실수를 빵빵터뜨리는 신규 간호사가 바로 앞에 있는 한 말할꺼리는 매일 무궁무진하다. 중간연차가 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관심의 대상은 새로운 신입으로 옮겨가기 나름이여서 버티면서 기다리는 것이 태움에 대응하는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다. (성악설에 과감히 한 표 던진다.)


내가 이 곳에서 일하며 생겨났던 무수한 실수들은 그 중요도에 관계없이 하나에서 열까지, 아무리 길어야 만 하루가 지나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복사기도 안다는 사내연애처럼 말이다. 한번은 장기오프였던(오프=휴가) 선생님을 오랜만에 마주쳤는데,그간의 안부를 묻기보다 "너, 이 일 이렇게 했다며. 그럼 안되는거지!" 라며 핀잔을 주시더라. 나를 제외한 단체 카톡방이 있는 것이 틀림없어.




오늘도 신규답게 일찍 출근했다. 어제보다 덜 힘들었으면 좋겠단 간절함을 담아 탈의실로 들어가 서둘러 간호사복으로 갈아 입으려는데, 장을 열자마자 덕지덕지 붙어있는 메모들이 시야에 확 들어온다. 내 뒷턴이셨던 선생님께서 내게 인계받을 당시 미처 캐치하지 못한, 나의 미숙한 업무들을 정리한 뒤, 열심히 타이핑까지해서 붙여주신 거였다.


캐비넷 바깥도 아니고 안쪽에 붙여주신 것은 나를 위한 배려였을까?


하지만 정작 나는 심술궂게도 마치 엄마가 내 허락없이 방 청소를 하신 것을 알았을때보다 더 별로인 마음이 든다. 잠그지만 않았을 뿐, 캐비넷 안은 개인 공간인데 나 아닌 누군가가 내 허락없이 열어보았다는 것이 일차적으로 불만스러웠다. 우리들이 늘상 사용하는 프로그램의 쪽지 기능으로 말해줬더라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기우였다. 환자파악을 위해 그 프로그램에 내 아이디로 접속하자마자 깜빡깜빡거리면서 새로운 쪽지가 한가득 도착했음을 알리는 저 알람. 꼼꼼히 하나씩 읽어보니 캐비넷 안에 있던 내용과 똑같다.


'아, 내가 이런 실수를 했구나. 처리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스러우셨을까. 진짜 죄송하다.' 싶은 내용도 많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개중에는 '아, 이건 너도 맨날 하는 실수잖아. 나도 이거때문에 엄청 고생했었다고.'라는 신입치고는 다소 건방진 생각이 들기도 하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시각에서 살펴보면 내가 실수한 부분들이 상당수인게 사실이다. 이런 것들을 수용해서 빨리 배워나가는 것이 나에게 보다 더 중요한 부분일테다. 그만 투덜거리자. 누구처럼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제대로는 해보자. 

오늘도 마스크를 미리 써둔 것이 표정관리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요새 출근하자마자 간호사 스테이션 왼쪽 한켠에 비치된 파란색 덴탈 마스크 한장을 먼저 챙기는게 일상이 되었다. 나이스잡.


오늘은 이브닝 근무다.(이브닝 근무시간: 오후3시~오후11시) 데이번 선생님들, 그리고 수선생님과 함께하는 인계시간이 코 앞인데, 출근할때부터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던 수간호사 선생님의 표정이 조금 신경쓰였다.


"너희들, 내가 저번에 환자 혈당체크할때 직접 너네 사번 입력하지말고, 사원증에 바코드로 찍으라고 하지 않았어?"


아, 이거였구나. 우리 병동엔 당뇨 등 다양한 내과적 질환을 가진 부인과 환자들 혹은 임신성당뇨 산모들이 꽤 있어서 은근히 혈당을 측정할 일들이 많다. 병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곳에서 환자들의 혈당측정은 보조원 잡으로 잡혀있다. 하지만 신규간호사는 이미 병동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매김한 보조원 분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일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정도 쯤이야 알아서 적절히 시간을 쪼개 해내야 센스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규칙상은 자기일이 아니니 보조원에게만 혈당 측정 업무를 맡기는 간호사는 어김없이 보조원 입을 통해 올드간호사의 귀로 이름이 흘러들어가서 면박을 당하곤 했다. 사실 서로의 일을 딱딱 나누기보다는 함께 하자는 좋은 취지로 시작된 일이였겠지만 화장실 한 번 편히 가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신규간호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부분도 하나의 고충이였다.


혈당측정 기계를 사용할때 직접 자신의 사번을 손으로 일일이 입력하는 것보다는 바코드로 한 번 딱 찍는게 훨씬 간편하지 않냐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업무방식이 바뀐지 얼마되지 않았고, 기계에 은근히 바코드 인식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한 번 로그인에 실패하게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로딩시간이 길어진다. 수간호사 선생님으로부터 공지는 받았지만, 다들 암암리에 5숫자에 불과한 사번을 누르곤 했다.


" 이거 나 벌금매길꺼야. 말을 하면 들어야지. 내가 오늘 룰 안지킨 사람들 싹 조사해서 이름이랑 횟수 리스트 뽑아서 적어놨거든? 실수 한 번당 벌금 천원이니까 그렇게 알고 오늘까지 내."


오마이갓. 정규잡으로 가득 찬 데이근무때 이런 걸 정리하실 시간이 있었다니 수간호사 선생님의 업무능률이 무척이나 감탄스럽다. 비아냥을 집어치우고, 현실적으로 바라보자. 그말인즉슨 수선생님께서 해야만 하는 일들이 그 동안 올드 선생님한테 넘어갔다는 것. 또 그 말은 다른 팀의 선생님은 올드 간호사의 일을 나눠서 했을 것이라는 것.  

이것들로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은, '오늘은 평상시보다 집중해서 인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


내가 거르거나 확인하지 못한 앞 선생님의 업무는 내 뒷턴 간호사가 발견하는 순간 내 책임이 된다.


거르지 못한 죄


처음에는 엄격하게 보면 내 실수도 아닌데 왜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뒷턴 선생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올드 간호사 선생님께 이거저거 안했으니 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병동 분위기상 부담스러울테다. 하지만 자기가 그 일을 하는건 더더욱 싫겠지.


모르는걸 가르쳐 준다는 방향으로 포장해서 저연차 간호사에게 하도록 하는 것이 명분도 생기면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번에도 앞 턴 선생님께서 간호정보조사지를 작성하시다말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조용히 퇴근을 하셔셔, 일하는 도중 빈 창을 발견하고는 이미 입원 중인 환자를 스테이션으로 불러 이것 저것 물어보며 칸을 채운 적이 있다(간호정보조사지는 보통 환자가 입원하자마자 바로 시행하는 일이다).


하필이면 환자가 평소 복용하던 약이 한바가지라 이걸 또 다 드러그인포나 킴스같은 약 관련 사이트에서 모양 조회를 해가면서 일일이 찾아야만 했는데 꽤나 시간을 잡아먹는 업무였다.


내가 자기보다 아랫연차니까 이렇게 일을 미루는구나 하는 생각에 일을 하면서도 가슴속이 시끄럽다. 하지만 아직 일이 능숙하지 않은 신규 간호사는 선배들에게 배울 부분이 더 많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라도 뒤를 봐주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끼쳤던 민폐를 상쇄하고 있다고 주문을 외워본다. 

하지만 선배들은 전혀 그 과정을 고마워하지 않더라. 한 올드선생님께서 자기가 미룬 일들을 당연히 해주지 않은 어떤 아랫연차의 뒷담화를 하는 것을 보고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건 안비밀. 

사실 병원만 이렇지는 않을 터, 어느 직장이든 합리적으로만 굴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김토다, 니가 제일 많네. 너 벌금 이만칠천원이야.


아니 그래도, 벌금같은 부분은 경고부터 먼저 주는게 맞지 않나? 느닷없이 쌩 돈 27,000원을 뱉게 생겼다. 수선생님께서 하루종일 정리하셨다는 벌금장부를 보며, 이것이 과연 벌금인가, 갈취인가 헷갈렸다. 원칙적으로 내 업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환자들의 혈당측정을 해왔는데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절차를 어긴 것은 사실이였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다. 6개월은 더 버텨야 퇴직금이라도 받을 수 있고, 이력서에 한 줄 떳떳히 적을 수 있다.


'까짓꺼, 이거 내고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아깝지만 커피 몇 잔 안마시면 되지.'


여전히 기분은 나쁘지만 어차피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없다는 무력감이 든다. 지금 바로 벌금을 내라는 수간호사 선생님의 득달같은 성화에 쫒기듯 ATM기를 찾아가 돈을 뽑고 있는데, 봉투를 들고 팔짱을 낀 채 병동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선생님 앞으로 가자니 빚쟁이가 된 듯, 서럽다.


이만칠천원,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다는 돈. 생각해보니 궁금하네. 어떻게 쓰여졌을까?





이전 08화 8.내가 오래 근무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