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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간호사 Jul 02. 2020

10.직장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

포식자의 날카로운 이빨에 너의 야들야들한 뒷목을 들이민다는 의미 

이 달 근무표는 우리 모두의 '베스트셀러'다. 누구든지 그 한 장을 일단 손에 쥐었다 하면 읽고 또 읽고, 틈만 날때마다 계속 노려보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수간호사 선생님의 찌푸린 미간에서 겨우 겨우 나온 가안이 여러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본이 되면, 눈치껏 바로 사진을 찍어서 카톡을 통해 공유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것은 동료에 대한 기본적인 미덕이였다. 




근무표가 짜여지기 전, 간호사들은 병동 내 '스케줄 노트'에 자신들이 꼭 필요한 오프날(=휴일)을 적어 제출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한다. 내가 있던 병동의 경우, 입사한지 6개월이 지나야 이런 '원티드 오프'를 하루라도 적어볼 수 있었고, 이마저도 다른 올드 선생님들의 신청일과 겹치지는 않나 눈치껏 체크해야 했다. 

물론, 작성순서는 연차순서이다. 만약 자신보다 연차가 높은 선생님보다 먼저 적었을 경우, 내 오프 신청 내역이 화이트로 감쪽같이 지워져있는 굴욕을 맛볼 수 있으니 조심하시라.

아, 그리고 입사 후 1년을 채우기 전까지는 주말에 원티드 오프를 쓸 수 없었다.


'부모님 생신인데, 친구들과 여행가기로 해서 이미 표를 끊어놨는데, 집에 일이 있는데' 등등의 구구절절한 사연 하나 없는 오프는 없다. 즉, 서로 겹쳤을 경우, 양보도 쉽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연차순으로 반영이 되기 마련이였다.


이렇게 왠만하면 원티드 오프를 받을 수 있게끔 요리조리 머리를 굴렸으니, 과연 내가 신청한 스케줄이 잘 반영이 되었는지의 여부는 지갑사정과는 상관없이 다음달 업무 의욕을 결정하는 무엇보다 큰 변수가 된다. 


이외에 스케줄표를 통해 분석할만한 내용은, 함께 근무를 하게 되는 파트너 간호사는 누구인지, 내가 인계를 주는 대상은 누구인지(빡세게 인계받는 스타일이면 일이란 일은 옴팡 뒤집어 쓰고 퇴근은 할 수 없는 무한 야근이 발생됨), 혹시 친하거나 만만한 상대 중 나와 듀티를 바꿔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은 없는지 등등이 되겠다(올드 간호사 한정). 

A4용지 단 한 장의 스케줄표로 다가오는 미래를 예측하고 추론까지 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숨은 논리력까지 찾아내 키워주는 참으로 바람직한 도구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달의 스케줄이 당신 성에 차지 않는다면, 아무리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더라도 최소 3일 정도는 강한 분노감이 차올라 가슴에 '퇴직서'로 꽃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원참.




오늘은 이 달 스케줄이 짜여졌던,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한달 전부터 예견된 날이였다. 


그런 날이 간혹 있다. 연차가 낮은 간호사끼리 같은 듀티에 붙어 근무를 하게 되는 말도 안되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날. 왠만하면 이런 부분은 올드 선생님들이 캐치해서 수간호사 선생님께 수정을 요청드리지만, 올드 간호사들의 '원티드 오프(개인적으로 쉬길 희망하는 날)'를 어느정도 반영하기 위해 불가피할 경우에는 그들도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움직이는 시한폭탄끼리 맡붙었으니, 서로 으쌰으쌰 도우면서 상생을 노리기는 커녕, 각자도생하며 상대에게 피해만은 주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라도 가져야 했다. 나는 이제 입사한지 겨우 9개월, '환타(=환자를 타다=유난히 일이 많아 고생하는 간호사를 일컫는 별명)'로 유명한 3개월 터울 선생님도 이제 막 1년을 채운 ‘애송이’간호사였던 터라, 다시 말하지만 서로의 가르침이나 도움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였다. 우리는 출근과 동시에 오늘은 절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생기지 않을 것이니 식사는 주문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이브닝 근무(이브닝 근무시간:오후3시~오후11시)를 시작하게 되었다.


'환타'는 '환타'였다.


이미 전 듀티인 데이 근무때 어느 정도 급한 일이 마무리되어 별다른 이벤트가 없는 우리 팀과는 다르게, 옆 팀은 어찌나 바쁜지, 앉아서 챠팅을 한다 싶어 쳐다보면 저만치 뛰어가서 환자를 보고 있고, 저쪽에서 혈압을 재고 있다 싶으면 뒤쪽으로 지나가며 추가 처방이 들어온 약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아주 홍길동 모드였다.


전형적인 ‘환타’답게, 응급실에서 올라온 부인과 환자와 함께 출근한다 싶더니, 결국 그 환자의 응급 수술이 급히 결정되어 버렸다. 아직은 뭔가 일이 어설픈 레지던트 2년차 선생님과 쿵짝도 잘 맞지 않아 서로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헤맨다 싶더니 이제 막 해결되었는데, 갑자기 교수님께서 중환자실에서 잘 케어받고 있던 산모 하나를 병동으로 올리겠다고 EMR을 통해 폭풍 추가오더를 띄우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인계를 위해 정리해야 할 내용이나,  서둘러 수행해야 할 처치가 한바닥인 걸 내 막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 산발을 하고선 화장이 다 녹아내린 얼굴로 정신없어 하는 모양새를 보니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건 도와야 겠다는 생각에 눈치껏 옆팀의 저녁약 정리나, 카트 정리 등 자잘한 일들을 도와보았으나, 정작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일들은 그녀 스스로 해야했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터. 나 역시 눈에 띄는 큰 이벤트는 없더라도 자잘자잘하게 일이 끊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였다.


시간이란건 정말 속절없지 않는가. 나이트번 인계시간이 쏜살같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스테이션 너머로 옆팀 나이트 선생님이 이브닝인 그녀를 노려보면서 걸어오고 있다는 것이 내 옆얼굴로도 화끈화끈하게 느껴진다. 신규간호사의 뒷턴을 받아보면, 어찌나 흘리고 가는 것들이 많은지 힘들어 죽겠다며 동네방네 자신의 노고를 토로하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어떻나 보자 벼르고 있는 상황이였다.

 

유독 정신이 없던 오늘,이브닝 선생님은 나름대로 뛰어다니며 이것 저것 많은 일을 했겠지만, 정작 컴퓨터 앞에 앉아 프로그램상에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기록을 전혀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뒷턴 선생님 입장에서는 기록만 봐서는 신규간호사가 과연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알아볼 수 가 없다. 인계시간임에도,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머리속에 한가득이라 자리에 앉지도, 그렇다고 환자에게 가보지도 못하고 문자 그대로 발만 동동 구르고 서있는 그녀를 일단 자리에 앉혀 인계를 받기 시작하는 옆팀 선생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너 바보지? 이러고도 월급받고 다닐 생각을 해? 니가 한 일이 뭐야? 나 일부러 엿먹이겠단거야? 너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기나해? 니 할 일은 나중에 하더라도 니가 지금까지 한 거 기록은 해놔야지 내가 파악이라도 할 것 아냐!! 이딴 식으로 일하면 나보고 어떻게 일하라는 거야!!"


옆팀인 나까지 주눅들게 만드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동을 가로 질러 마음을 후벼팠을 것이다. 간호사고, 지나가던 환자고 보호자고, 모두의 이목이 이 둘에 쏠려있다. 부끄러운 일이였다.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하긴 뭘 시정해. 여기가 군대야? 야!! 너 머리에 똥만 찼어? 이렇게 해놓으면 내가 일을 어떻게 하냐고!!!”

"선생님!! 저 좀 이해해 주세요. 저희 팀 오늘 갑자기 응급환자 수술도 있었구요, 예고 없던 중환자실환자도 병실로 올라왔고, 이 환자는 소변을 계속 보지 못해서 일이 있었고...저 좀 이해해주세요!!“


목소리가 좀 떨린다 싶어 불안불안하던 신규 간호사 선생님의 감정이 오늘 기어코 터지고야 말았다. 갑자기 어린 아이마냥 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저럴까.’


나라고, 뒷턴 선생님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였다. 가뜩이나 힘든 나이트 근무, 앞 턴이 일을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처리해야할 일이 계속 지연돼 나이트까지도 내내 바쁘고 고생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신규를 쥐잡듯이 잡는다고 바뀔 부분은 거의 없다. 사실 신규간호사의 업무능력은 한계치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인력을 이런식으로 배치받은 것은 우리 영역 밖의 문제도 포함된 것 아닐까? 이미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는 상태에서, 물어뜯기 쉬운 상대를 괴롭힌다고 업무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까? 어찌됐든 결론적으로는 내가 너 때문에 피해를 봐서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날이 설 수 밖에 없는 상대의 입장이라는 것도 이해가 조금은 되지만. 오죽했으면 저렇게 아이처럼 울까. 얼마나 서러웠으면. 나라고 저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을까? 


"얘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미쳤어, 아주. 야. 너 그냥 꺼져."


절절한 오열이 만든 병동의 공기는 평상시보다 곱절은 무겁다. 올드 선생님은 앉아있는 신규 선생님을 힘으로 일으켜 탕비실쪽으로 밀어 넣고 문을 쾅 닫아 버린다. 그래도 문 틈 사이로 비죽비죽 눈물섞인 서러움이 썰물처럼 삐져나온다. 한번쯤은 달랠만도 하다 싶었지만,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올드선생님은 바로 자신의 병동 동기에게 전화를 거는가 싶더니 이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기 시작했다.


"야, 00아, 내가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아? 신규가 나보고 자기를 이해를 해달래!!!!아주 지랄났어. 내가 신규를 모셔가면서 일을 해야 할 판국이야. 스테이션에서 환자들 다 있는데 막 울더라? 아니 진짜 내가 신규를 모셔야 하냐고!!"


직장에서의 눈물은 담배와도 같다구나. 그것은 정말로 백해무익하다. 내가 운다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업무량이 줄거나, 저지른 과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에게 일말의 동정을 기대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우리는 철처히 '일로 만난 사이'인 것이다. 

당장 나라도 따뜻하고 유머러스하지만 ‘일 못하는 선배’보다는 차가운 사람일지라도 ‘일 하나는 똑부러지는 선배’가 사회에서 말하는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곳에서 한사람의 몫 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신입사원이 내는 목소리는 명분조차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듣는 입장에게는 끝도 없는 짜증만 유발시킨다. 심지어 간호사부터 환자,보호자에게까지 공개된 장소에서 소리지르며 우는 모습을 보였으니, 마치 자신을 나쁜 사람인양 만든 괘씸죄까지 추가됐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포식자의 날카로운 이빨 앞에 내 부들부들한 목덜미를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었다.

마스크 밖으로 눈물, 콧물이 강을 그리더라도 나는 마치 운적이 없다는 듯 뻔뻔하게 목소리는 흔들려서는 안된다. 결국 옆팀의 신규 선생님은 그 날 새벽 6시가 넘어 퇴근을 했다고 하였다. 당연히 초과근무 수당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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