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m씩, 1km씩 거리를 늘려가며, 나는 운동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 얼마나 큰 희열과 행복감을 주는지 알아가게 되었다. 일상에서 늘 겪는 실망, 미움, 좌절, 후회, 아쉬움, 분노 등,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한 판 뛰고 와서 흠뻑 땀을 흘린 후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삶을 괴롭게 만드는 많은 문제들이 그까짓거 마음 한 번 다시 먹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나는 러닝을 시작하고 알게 되었다.
뛰는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뛸 시간을 만들까지 어떠한 번잡함이 존재했는지, 뛴 시간과 페이스야 어찌되었든, 모든 러닝은 끝나고 나면 나에게 커다란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지나고 보면 아름답지 않았던 러닝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소위 내가 '러너스하이(runner's high)'라고 불리는 상태가 이것일지 아닐지 알쏭달쏭했다.
러너스하이는 긴 운동 후 신체와 뇌의 화학 작용으로 찾아오는 강렬한 희열이라고 한다.* 통상 나같이 한 번에 보통 30-40분 정도 조깅페이스로 뛰는 사람이 도달하기는 어려운 경험이라고 들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1시간 이상을 뛰기도 하니 언젠가는 나도 러너스하이를 영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나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처럼 쫓기는 일들이 한 차례 마무리되고 난 후였다. 아직 춥지 않은 가을이었다. 햇빛도 아름답고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이미 나가기 전부터 완벽한 조건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러너들은 알 것이다. 한국 날씨에 야외러닝하기 좋은 계절이 얼마나 짧은지. 봄 가을 잠깐 중, 미세먼지도 없고 비도 안오고 햇빛이 찬란한 날이 얼마나 며칠 안되는지. 그리고 그 며칠 중, 내가 다음 일정에 쫓기듯이 간신히 운동량만 채우고 허겁지겁 귀가하지 않아도 되는 날은 별로 없다.
그날은 이 모든 조건이 다 맞아 떨어졌다. 오늘같이 아름다운 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내 체력이 다할 때까지 뛸 여유가 있다니. 이미 러닝 복장을 챙기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래는 집에서 늘 뛰는 한강으로 나가 5km를 달려갔다가 5km를 돌아와 10km를 뛸 예정이었다. 그런데 날씨 탓인지, 기분 탓인지 5km를 다 뛰었는데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좀더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3km쯤 더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딱 한시간 조금 넘게 달렸을 무렵이었다. 내 플레이 리스트에서는 러브홀릭의 Butterfly가 나오고 있었다.
태양처럼 빛을 내는 그대여
이 세상이 거칠게 막아서도
빛나는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
널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평소 같으면 참 오글거린다 싶은 가사인데, 그 날은 날이 그래서인지 1시간을 넘게 뛰어서인지 그 전까지 온갖 일에 워낙 시달리다 마음이 약해서였는지 구구절절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슬슬 한계점에 도달해서 무거웠던 다리와 뻐근해 오던 골반, 그리고 피로한 느낌이 사라졌다. 몸이 가벼워졌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달려오던 페이스에 그냥 몸이 맡겨진 느낌. 찬란한 햇빛과 파란 하늘은 아름답고, 그 무엇도 나를 막을 수 없고 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극도의 행복감. 어디선가 도파민이 펑펑 솟아올라 몸을 꽉 채우는 것 같은 느낌.
그 짜릿한 경험에 나는 내 한계를 넘어서 최장거리를 뛰었다.
참고로, 나는 그 후 나는 아직도 그 이상 뛰어본 적이 없고 그 날을 넘어선 러너스하이를 느껴본 적은 아직 없다. 그렇지만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거나 글이 잘 풀리지 않아서 마음이 힘든 날은 여지없이 나의 첫 러너스하이를 떠올린다. 이 세상 못할 것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던 그 느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