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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Oct 21. 2024

도쿄 목욕탕의 여인들


도쿄에서 숙소를 선택할 때 내가 중요시 여기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숙소 내 온천이나 대욕장의 여부이다. 일본, 특히 도쿄의 호텔은 타 나라, 도시 대비 비교적 객실의 크기가 작은 편이다. 따라서 자연스레 욕실도 비좁을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좁은 방, 좁은 욕실에서 홀로 샤워하는 게 무섭다. 이런 결정적인 연유로 욕탕의 존재는 나에게 최우선 순위이다.


물론 그 외의 이유도 있다. 온천 문화가 발달한 일본 답게 욕탕에는 간단한 세면도구와 미용용품이 잘 갖추어져 있다. 여행용 캐리어를 쌀 때 한결 수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매일 저녁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고 퉁퉁 부은 다리의 피로를 풀며 오늘 한 일, 내일 할 일을 머릿속에 그리는 시간은 하루의 마무리로 안성맞춤이다. 단, 한 가지 문제만 빼면 말이다.




첫째 날,

취침복으로 갈아입고 수건과 개인용품을 챙겨 대욕장으로 향했다. 일본 특유의 옛날 시골 목욕탕 느낌이 나는 곳이다. 탈의를 하고 락커를 잠그려고 보니 디지털 키 방식이 아니다. 다행히 사용방법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비밀번호 4자리 숫자를 수동으로 돌려서 일렬로 맞추고, 문을 닫고,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린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역시 상쾌하다. 얼굴이 땅기니 빨리 로션을 발라야지. 어? 락커가 열리지 않는다. 몇 번을 반복해 봐도 마찬가지다. 당황한 나의 모습에 마침 머리를 말리고 있던 친절한 일본 아주머니 한 분이 나섰다. 그녀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고, 직원이 올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잠시 후 직원이 욕탕 입구에 도착했고, 아주머니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나를 다시 탕 안으로 들여보낸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열리지 않는 내 락커로 직원을 안내했다. 그렇다! 여자 목욕탕 락커를 열기 위해 남자직원이 출동한 것이다. 그 친절한 도쿄의 여인이 직원을 응대하는 동안 나는 욕탕 문 앞을 지키며 목욕을 마치고 나가려는 그녀들을 막아섰다.


“밖에 남자직원이 있어서 지금은 나가면 안 돼요, 고멘나사이!”


남직원이 임무를 다하고 떠난 뒤에야 욕탕 문이 열리며, 아주머니의 환한 얼굴이 나를 맞이한다. “이제 나와도 돼요!”




둘째 날,

어김없이 욕탕에 몸을 담그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옷을 입기 위해 다시 락커 앞에 섰다. 어제의 실수를 바탕으로 예행연습까지 했으니 오늘은 열릴 것이다. 자만이었나, 오늘도 락커는 내 손을 떠나 버렸다. 전날의 학습으로 전화기가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찾아들고 프런트로 연결했다. “락커가 안 열려요!”

전하기 너머로 남직원의 묵직한 한숨이 들려왔다. 아마 어제 사건과 동일인물인 걸 아는 듯하다. 옆에서 옷을 입고 있던 여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다시 욕탕으로 들어가 문을 막아섰다.


“밖에 남자직원이 있어서 지금은 나가면 안 돼요, 고멘나사이!”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부탁했던 그녀가 나와도 괜찮다고 신호를 준다. 다행히 오늘은 여직원이 와 있다.




셋째 날,

자신감을 상실했다. 오늘은 락커를 잠그지 않았다.


넷째 날,

언제까지 피할 순 없다. 다시 예행연습을 단단히 하고 락커문을 닫았다. 그리고 목욕을 마친 뒤 비장한 마음으로 락커 앞에 섰다. ‘어, 열렸다!‘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다섯째 날,

어제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붙었다. 목욕을 마치고 당당히 락커 앞에 섰다. ‘열리지 않는다!’, 마음을 추스르고 락커 위치를 착각한 게 아닌가 싶어 옆 락커에 비밀번호 네 자리를 맞춰봤다. 1120, 내 생일이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리니 락커가 열린다. 그런데 안에 든 내용물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여러 날을 통틀어 오늘이 가장 충격적이다.


그때 목욕을 마치고 나온 한 여성이 내 옆에 섰다. 그리고 잠겨있지 않은 본인의 락커와 나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번갈아 바라본다. 바로 방금 내가 연 락커의 주인인 것이다. 그녀도 나도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 비밀번호 뭘로 하셨어요?

- 1120이요.

- 저도 1120인데.. 제 생일이에요.

- 저는 기념일이에요.

- 락커가 열렸는데 제 옷이 아니라 깜짝 놀랐어요. 죄송해요.

- 어머, 세상에 이런 일이! 진짜 신기하네요.


오늘도 나는 락커 열기에 실패했기에, 망설임 없이 전화를 들어 프런트행 단축키를 눌렀다. 요전날과는 다른 남직원이 받는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 조금은 다행이다 싶다. 나와 같은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던 옆 락커 주인에게 부탁을 하고 다시 탕으로 들어가 문을 막아섰다.


“밖에 남자직원이 있어서 지금은 나가면 안 돼요, 고멘나사이!”




난 아직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목욕 후 먹는 편의점 우동라면은 꿀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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