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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유 Sep 21. 2018

안 풀리는 날

[Day 145] 슬로베니아 류블라냐, 이탈리아 베니스

9월 1일, 아침 /

류블라냐 (슬로베니아)



아침 6시 30분, 베니스로 가는 버스가 예약되어있었다. 그걸 타려면 숙소 근처에서 5시 51분에 오는 18번 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가야했다.


5시 25분에 일어나 부랴부랴 챙겨서 집을 나선 시각은 5시 44분이었고, 냅다 뛰어서 5시 47분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뭐 두고 온 거 없겠지? 하자 그가 응, 하더니 1초 뒤에 '모자?'하는 거였다. 


"아, 모자!"


"모자 없지. 내가 갔다와볼게."


모자가 없다는 걸 알게 된 후 딱 3초 만에 그는 전속력으로 숙소를 향해 질주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만 3분이 걸렸는데 가서 모자를 가지고 다시 오는 것이 3분 안에 가능할까? 걱정되었지만 이미 그는 떠난 뒤였다. 혹시 버스가 그보다 먼저 도착하면 어떡하지? 적힌 시간보다 더 일찍 올 수도 있잖아. 그가 혹시나 시간 안에 모자를 가져오는 것만 생각하고 너무 뛰다가 어디 걸려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모자는 아무래도 괜찮고 버스도 뭐 놓칠 수도 있는 건데 몸 다치면 절대 안 될텐데.


그는 딱 51분에 나타났고,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모자는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열쇠가 안에 있더라고..."


생각해보니 우리가 체크아웃을 하느라고 열쇠를 방 안에 두고 문을 닫아 문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아, 그러네..."

"괜~찮다! 새로 하나 사자!"

"그러자~!"

"근데 왜 버스 안 와?"


류블라냐 숙소 근처 버스정류장 앞 풍경


이야기를 나누는 새 시간은 53분이 되었는데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나는 불현듯 오늘이 주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시간을 보았다.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오늘 토요일이잖아!' 하며 버스 시간표를 봤다. 주말엔 5시 대 버스는 없고 6시 5분이 첫차인 것 같았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었다. 베니스 가는 버스가 6시 30분 출발이니, 6시 5분 차를 타도 제시간에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다. 십 분 정도를 그저 여기서 기다려야 했다. 한동안 멍 때리고 있다가 내가 정적을 깼다.


"우리 모자들의 수명이 참 짧네."

"그러게. 그래도 이스라엘에서 산 내 햇(hat)은 오래 가고 있어!"

"맞다. 그건 오래 가네. 근데 우리가 두고 나온 게 이천오백 원 주고 산 모자여서 진짜 다행이다. 중요한 거 아닌게 얼마나 다행이야. 중요한 거 였으면 다시 달려가서 나무에 걸려있는 키로 문 열어서 가져왔겠지."


"아, 나무!"


이 숙소에서는 체크인 부터 체크아웃 때까지 호스트를 볼 수 없었다. 체크인 때에도 나무에 HYUNSOO라고 적힌 종이 쪽지와 함께 걸려있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고, 체크아웃 때에도 그냥 열쇠를 안에 두고 나오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며칠 있으면서 몇 명의 게스트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 모두 같은 방식으로 체크인을 했기에 나무에는 늘 몇 개의 열쇠들이 걸려있었다.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나무가 있었네... 다시 갔다올까?"

"에이, 아니야~ 뭘 또 가~"

"아냐 나 진짜 아쉬울 것 같은데... 함만 갔다와볼게!"


'지금은 열쇠가 없을 수도 있잖아...!'라는 내 외침을 뒤로 하고 그는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은 6시 1분이었다. 그는 나무에 열쇠가 걸려있는지 확인 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게 못내 아쉬웠는지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다시 숙소 쪽으로 달려갔고 나는 또다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6시 4분 쯤이 되었을 때 그는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그의 손에는 무엇도 들려있지 않았다.


"열쇠가 안 걸려있어."


어제는 그렇게 많이 걸려있던 것이 오늘은 하나도 없다니. 허탈한 그의 표정 만큼이나 나도 아쉬웠다.



버스가 오기로 예정된 6시 5분이 되었는데 버스는 오지 않았다. 이제 우리에게 시간은 많지 않았다. 6분이 되고 7분이 되자 8분 까지만 기다려보고 버스가 오지 않으면 다시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다. 출발 시간 15분 전 까지만 환불이 되기 때문에 제시간에 터미널에 도착할 수 없을 바에는 얼른 와이파이를 잡아 환불이라도 해야했기 때문이다. 8분이 되어도 버스는 오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버스를 환불했다.


다음으로 예약 가능한 버스는 8시 45분 차였다. 50유로를 더 지불하고 다음 버스를 예약했는데, 문제는 그때까지 있을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숙소 앞에 와있지만 열쇠가 안에 있기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혹시나 누가 나오지는 않을까, 누가 나와주면 우리는 모자도 찾을 수 있고 방에 좀 더 누워있다 나올 수 있을텐데,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한참을 문 앞에서 서성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다시 정류장에 서서 하염 없이 기다리니 얄궂은 18번 버스가 왔고, 십 분 후 우리는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베니스 행 8시 45분 버스를 타기 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아서 바로 맥도날드로 들어갔다. 맥머핀 두 개를 시켜 그와 나눠 먹고 난 엎드려 잠이 들었다.


결국 찾지 못한 우리의 모자들... 




9월 1일, 오후 /

베니스 (이탈리아)



베니스에 도착했다. 호스텔에 짐을 풀어놓고 아침에 하지 못한 샤워를 하고 길을 나섰다. 대중교통 이용권이 3일권인데 우리는 이곳에 4박을 하기 때문에 첫 날인 오늘은 걸어서 돌아다니고 내일 대중교통 이용권을 개시하기로 했다.


베니스 섬의 유일한 버스정류장인 산타루치아 정류장에서 부터 걷기 시작하여 산마르코광장 까지 걸었다. 리알토 다리, 산마르코 대성당, 두깔레 궁전 등을 눈에 담아두었다. 꼬불꼬불 미로 같은 베니스의 길들을 뚫고 걷다보니 이미 3km도 넘게 걸은듯 했다. 



배가 고파와서 저녁을 먹으러 레스토랑을 찾았다. 아주 저렴한 가격의 메뉴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인터넷으로 이 식당을 검색해보니 평점이 1점대였다. 살다살다 1점대 음식점은 처음 봤다. 도대체 어느 지경이기에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악평을 해놓았나 읽어보니, 외부 메뉴판에는 엄청 저렴한 가격표를 전시해놓고는 다 먹고 계산서를 받아보면 테이블 차지에, 서비스 요금까지 더해져 아주 비싼 값이 나온단다. 거기에 더해 음식이 늦게 나온다, 너무 맛이 없다, 동양인을 차별한다, 등의 의견들도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자마자 이런 것을 읽게 되니 마음 편히 음식을 기다릴 수 없었다. 음식은 도대체 어떨지, 우리의 계산서에는 얼마가 찍혀있을지, 우리는 한껏 긴장을 했다.


다행히 음식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계산서에 찍힌 가격도 우리가 리뷰를 보고 대충 예상했던 금액이 나왔다. 모르고 이 계산서를 받았다면 적잖이 놀랐겠지만 우리는 리뷰를 읽음으로써 매를 먼저 맞아놓았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편치 않았던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얼른 이곳을 뜨고 싶은 생각에 즉시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1점대 레스토랑에서 먹은 라구 뇨끼와 마르게리따 피자




이미 해는 저물어 어둠이 찾아왔고,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얼른 처마 밑에 숨어 챙겨온 바람막이를 꺼내 입고 가방에도 레인커버를 씌웠다. 장기여행자에게 우산은 사치라는 것을 안지 오래라 우리에게 우산 따위는 없었다. 바람막이 뒤에 달린 모자를 쓰고 젖은 땅을 바라보며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안 걸었는데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이렇게 힘센 소나기가 올 때에는 조금만 기다렸다가 가면 금방 빗줄기가 약해지는 것을 여러번 경험했기에 우리는 건물 밑으로 가서 숨었다. 두세 사람, 네다섯 사람이 와서 이곳에 모였다. 스무 명도 넘는 사람이 오갔는데 비는 좀처럼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식당에서 좀 더 앉아있다 나올 걸.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서 우리는 고민하다 결국 이 빗속을 뚫고 가보기로 했다. 내가 먼저 빗속으로 뛰어들었고 그가 뒤따랐다.


미션: 시소유를 찾아보세요. (난이도 상)


십 초가 멀다 하고 천둥 번개가 쳤다. 번개를 꼭 천둥이라고 말하는 그가 '천둥이다!!'하면 그건 분명 번개였고, 뒤이어 진짜 천둥이 우르르쾅쾅 울려퍼졌다. 골목골목은 너무 어두웠고 길은 미로 같기만 했다. 열심히 달렸는데 막다른 길이 나와 돌아나가야 할 때도 있었다. 이토록 굽이친 길인데 비가 너무 많이 오는 탓에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며 갈 수도 없었으며, 젖은 손을 젖은 옷에 닦아가며 겨우 지도 앱을 켰을 때에도 GPS는 작동하지 않았다. 옛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베네치아의 매력인데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 밤에는 그 매력이 다 무슨 소용이랴, 전부 귀신의 집처럼 황량하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약간 겁을 먹었지만 얼른 집에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운 내서 열심히 걷고 또 뛰었다. 그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았는데, 어딘지 꽤나 신이 나 보였다.


"나 이런 거 좋아!!! 엄청 찌질한 배낭여행자 같고 좋다~"


그의 상기된 말과 어린 아이 같은 표정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ㅋㅋㅋㅋㅋㅋㅋ 그게 뭐야~~!"

"다음에도 우리 한 번씩 이렇게 하자! 빗속에서 뛰니까 낭만적이다~!"

"이걸 또 하자고??!!?? 천둥번개 이렇게 많이 치는데!?? ㅋㅋㅋㅋㅋㅋ"


그는 가끔 너무 철이 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대신 그보다 훨씬 자주, 그 해맑음으로 나를 웃게 하는 사람이다.




호스텔에 도착해서 우리는 비에 쫄딱 젖어버린 옷들을 벗고 뽀송뽀송한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야 완전히 무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의 긴장이 확 풀리며 피곤이 몰려왔다.


자려고 누워 생각해보니 뭐 하나 잘 풀린 게 없는 하루였다. 돌이켜본 우리의 모습이 참 웃기면서도 애틋해서 미소가 새어나왔다. 이층 침대 위에서 벽 쪽으로 몸을 딱 붙여놓고 일층 침대에 누워있는 그에게로 얼굴을 내밀어 소곤한 목소리로 오늘을 곱씹었다. 하루 종일을 붙어있어도 잠들기 전 까지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2018.09.01.

세계여행 Day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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