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 엉덩이에 박힌 달조각
[달조각을 모으는 남자] 15화
우리는 물망초를 옆에 두고 수풀에 앉았다. 이슬 가득 먹은 수풀이 엉덩이를 적셔댔지만, 이미 여러 번 젖었던 터라 신경 쓰이지 않았다. 우비 사이로 비가 새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배고프다. 여기서 뭐라도 먹을까?"
"비 맞으면서?"
"응!"
비가 거세진 않았지만 나름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왜인지 그와 비를 맞으며 음식을 먹고 싶었다. 아마 언젠가 오늘을 기억하며 웃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매신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빗방울이 그의 이마 위로 토도독 떨어졌다.
"음식이 다 젖을 텐데..."
"그렇지만-비에 젖은 빵을 언제 먹어보겠어..."
"하하, 알겠어."
매신을 짧게 웃고는 목걸이에 손을 넣었다. 일렁이는 바다거품, 비 맞는 수국처럼 아름다웠다. 매신은 계란 샌드위치와 딸기우유를 꺼냈다.
'도대체 몇 개를 사다 놓은 거람.'
매신의 목걸이에서 샌드위치와 딸기우유는 무한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몇십 개를 쟁여놨을 매신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고마워, 잘 먹을게."
우리는 수풀에 앉아 빗물 섞인 딸기 우유를 마셨다.
샌드위치는 흐물거리긴 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빵 시트가 부드러워 목 넘김이 좋았다. 사실 지금 이 순간을 먹는 거라 어떤 맛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고 매신을 바라보았다. 굳이 바닥에 앉아 비에 젖은 샌드위치를 먹고 있자니, 또 나를 따라먹는 매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만 웃음이 났다. 정말이지, 몇 년이 지나도 생각날 에피소드였다.
"하하하"
"하하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웃었다.
그때 갑자기 매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소라, 잠깐 가만히 있어봐."
내 어깨를 가만히 주시하는 매신. 뭔가 끔찍한 거라도 붙어있는 걸까. 벌레를 무서워하는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눈을 질끈 감았다.
"뭐, 뭐가 있는 거야?"
"벌이야."
정신없이 웃다 보니 벌의 날개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벌에 쏘여 호되게 고생했던 때가 떠올랐다. 얼굴이 퉁퉁 부어 밤새 고통에 시달렸던 기억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입만 빵끗거렸다.
"매.. 매신.. 나 무서워.."
매신은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매신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눈을 감아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호흡이 솜털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두근 두근'
벌이 좀처럼 도망가지 않는지 매신의 호흡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잡았다."
"잡았다고?"
나는 눈을 천천히 뜨고 매신을 바라보았다. 맨손으로 벌 날개를 잡고 있었다.
"그러다 쏘이면 어떡해!"
"괜찮아, 바다사람은 독에 강하거든. 해파리와 가오리에게 살아남아야 하니까."
매신은 벌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 벌, 조금 특이해. 겁을 줘도 도망가지 않았고 날개를 잡을 때조차 아무런 반항이 없었어. 보통 벌은 겁이 많을 텐데..."
매신은 벌을 조심스레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벌은 얌전히 앉아 내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검은 눈이 정확히 뭘 보고 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얼굴의 방향이 나를 향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벌과의 아이컨텍이라니.
그때 벌이 몸을 뒤뚱거리며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토실하게 살 오른 엉덩이에 노란 줄과 검은 줄이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자 벌이 엉덩이를 씰룩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일단 벌 엉덩이를 계속 지켜보고자 했다. 사실 그저 엉덩이가 귀여워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귀여워..."
'씰룩 씰룩'
"어.. 어?"
그때 벌 엉덩이로 두 번째 노란 줄이 반짝였다.
"매신, 여기 다섯 번째 달조각이 있어!"
벌 엉덩이의 두 번째 노란 줄은 털이 아니라 얇은 그믐달이 박혀있는 것이었다. 내가 소리치자 그믐달은 벌 엉덩이에서 빠져나와 내 손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벌은 어디론가로 날아가버렸다.
"이렇게 쉽게 찾다니..."
우리는 손에 놓인 그믐달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 다 멍하니,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예전에도 벌 엉덩이에서 달조각을 찾았었어?"
매신은 고개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랬다면 기억했을 거야."
매신이 턱을 집고 말을 이었다.
"달조각이 먼저 찾아와 준 적은 없었어. 희한하게 소라와 함께 나선 순간부터 달조각이 쉽게 모이는 것 같아..."
'솨아-'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매신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
"우선 달조각부터 넣자."
갑자기 불어대는 바람에 행여 달조각을 떨어뜨릴까 서둘러 그의 목걸이에 그믐달을 넣었다. 목걸이 속 달은 마침내 꽉 찬 보름달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한 조각만 찾으면 된다.
'쏴아아-'
마침내 거세진 비의 입김이 우비를 뚫어댔다. 나는 자리에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숙소로 가볼까?"
"그러자."
나를 따라 일어나는 매신, 그는 나에게 손을 건네며 말했다.
"손 잡을래?"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기 싫었던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잡은 두 손. 매신의 부드러운 살결이 내 마음을 간지럽혔다. 어디선가 밀당은 반드시 필요한 종목이라 했지만, 난 그 앞에만 서면 당기기만 하거나, 여지없이 당겨질 뿐이었다.
매신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심장소리가 들킬까 손을 빼내려 할 때면 매신은 이렇게 말했다.
"다시 파도 칠 까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