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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Aug 19. 2024

자꾸만 붉어지는 얼굴

[달조각을 모으는 남자] 16화

"먼저 씻을래?"

매신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셔츠가 홀딱 젖 채로, 빗물이 목에 흐르는 채로 말이다. 매신의 말과 행동에 그만 얼굴이 달아오 것 같았다.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일어났다.

"으, 응. 씻고 올게."

매신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털어낸 머리칼을 손으로 쓸며 웃었다.

"응, 천천히 씻고 와."


젖어낸 옷을 벗기란 쉽지 않았다. 피부와 옷 사이 공기층이 없어져 마치 서핑복을 벗는 것만 같았다.

'솨아아-'

샤워기 호스를 타고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물머리칼부터 발끝까지 적셔댔다.

"좋다-"

가끔은 고급 수영장보다 이렇게 샤워기에 물을 맞으며 가만히 서 있는 게 행복할 때가 있다. 오늘이 딱 그런 것 같았다. 눈을 감 물을 맞았다. 멍-한 감각이 좋았다.

'아차'

밖에서 젖어 있는 상태로 기다리고 있을 매신이 생각났다. 서둘러 샤워기를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많이 기다렸..."

매신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어?"

그도 나도 적잖이 당황한 상황. 매신은 내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아 젖은 옷을 갈아입으려 셔츠를 벗고 있다. 책임은 분명 내 쪽이지만 풀어진 단추 사이 매신의 울국진 가슴을 봐버린 순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수건을 매신에게 던졌다. 

"뭐..뭐해!"

이런, 나도 모르게 소리쳐 버렸다. 매신은 단추를 허겁지겁 잠그고 일어났다. 그리 내 머리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하, 씻고 올게. 쉬고 있어."


'솨아아-'

매신이 욕실에 들어가고 샤워기 틀어졌다. 식었던 얼굴이 그새 다시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달아  얼굴을 식힐 겸, 그의 샤워기 소리를 지울 겸 드라이기를 틀어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휘이잉-'

목젖까지 내려오는 짧은 머리칼. 이미 빠짝 말라진게 느껴졌지만 속 드라이기를 켜 들었다.

"씻고 왔어."

어느새 씻고 나온 매신은 나 같은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언젠가 장터에서 함께 골랐던 옷이었다. 심장에 모기라도 물린 것일까. 긁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어..그래..."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다라이기 바람을 맞았다.


우리는 거실에 엎드려 달조각 지도를 펼쳤다. 의 몸과  몸에서 같은 향이 풍겨졌다. 바디워시의 향은 공기 중에 섞여 더 진한 향을 냈다. 넓은 거실에도 서로 가깝게 기대 엎드려 있는 우리어깨 조금씩 부딛혔다. 나는 분명 의도였지만, 매신도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매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통 마지막 조각을 어디서 찾았는지 기억나 않아."

"쩌면 마지막 조각도 먼저 찾아와 주지 않을까?"

"그래준다면 고맙지만..."

"흐음-"

"뭐, 앞으로 18일 남아있기도 하고, 아직 휴식기간이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칫 눈부실 뻔한 거실등은 다행히 꺼져있었다.

"하고 싶은 거 있어?"

휴식기간이 오면 늘 나에게 묻는 말. 나는 몸을 틀고 매신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가 하고 싶은 거 하자. 그동안 죽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잖아."

매신은 턱을 만지며 눈을 감았다.

"음, 그렇다면-"

나는 조용히 매신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가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것, 기대가 됐다.

"이틀 정도 각자 여행하는 건 어때?"

예상치 못한 매신의 답변에 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 등 돌려 누웠다.

"치, 알겠어."


하긴, 거즌 한 달 반을 계속 함께 했으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 때도 됐다. 그렇지만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다. 매신이 떠날 시간이 3주 채 남지 않았는데, 이후로 영영 작별인데, 나만 이렇게 아쉬운 건가, 하고 볼에 공기가 들어갔다. 하지만 그에게는 육지에서의 여행이 3주도 남지 않았다는 말이. 매신도 육지와 인사할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나는 볼에 담은 공기를 다시 내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이틀간 잠시 이별했다.




[D-17]


원래부터 홀로 여행할 작정이긴 했지만 매신과 긴 시간을 보내고 혼자가 되니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도, 혼자서도, 지금 이 시간 확실하게 누려주마!"

제주도에 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카페가 있었다. 도보로 가기 조금 먼 감이 있지만 날이 좋아 천천히 걷기로 했다.

"핸드폰이 없지만 찾아갈 수 있겠지?"

언젠가 봤을 지도를 되짚으며 바닷길을 따라 주욱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 까, 무더위에 못 이겨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침 앉기 좋은 벤치가 있어 그대로 상체를 뒤로 젖히고 숨을 골랐다. 옆으로 고개를 틀자 무리에서 떨어진 보라색 수국이 보였다. 혼자여서 초라하지만 혼자여서 더 화려한 수국은 뜨거운 햇살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물을 수국에게 조금 뿌려준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아뿔싸, 1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카페 하필이면 오늘 휴일이었다.

"이런, 젠장!"

처음엔 화가 났지만 결국 체념으로 이어지면서 나는 어깨를 축 내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카페 뒤편으로 허름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1층에는 'Dear. Me' 디저트 가게 있었다.

"친애하는 나에게 맛있는 하루를 선물하세요, 라..."

간판 아래에 적혀있는 문구였다. 마침 갈 곳도 없겠다,  나는 그대로 디저트 가게로 들어섰다.


"우와-"

건물의 허름한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깔끔했다. 아니, 도통 처음 보는 분위기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 정도였다. 4개의 방으로 이뤄진 가게는 방마다 다른 테마를 연출하고 있었다. 책들이 쌓여 있는 방(가운데 긴 주황 스탠드가 있다), 넓은 창문이 열려 있는 방(곳곳에 다양한 식물이 있다. 작은 수목원을 보는 듯하다. 식물은 주로 노란색이었는데, 아무래도 그쪽에는 전혀 관심 없던 터라 이름은 알 수 없다), 교실을 재연해 놓은 방(교실 의자와 책상이 있다. 칠판에는 급식메뉴가  있다. 아마 가게 디저트 메뉴인 것 같다), LP를 들을 수 있는 방(헤드셋을 이용해 듣는 듯하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어디가 좋을 가...'

그때 두 번째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꽃 이파리가 바람에 치여 살랑거렸다. 치 이리로 오라는 신호 같았다. 나는 결국 그들의 초대를 꺼이 받기로 했다. 


테이블에 팔을 두르고 상체를 실었다. 열려 있는 창문을 따라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대로 눈을 감고 몸에 감돌던 긴장감을 쭉 풀어냈다.

"좋다."

나도 모르게 나온 감탄에 피식 웃었다. 호흡을 한번 더 하려 숨을 들이마시자 코 끝으로 고소한 빵 냄새가 났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꼬르륵 거리는 배를 쓸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휘익-'

불어오는 바람에 창문에 달린 풍경 울렸다. 동시에 노란 꽃들도 함께 몸을 들썩였다. 마치 풍경소리는 노란 꽃들의 웃음을, 노란 꽃들은 풍경의 기쁨대신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분명 가게 직원일 테지만 혹여 매신일까, 문쪽으로 몸이 르게 틀어졌다.

"매신이야?"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결코 의도한 게 아니었다. 무의식이 그로 가득한 탓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직원은 고개를 꾸벅이며 준비된 디저트를 주었다. 나는 괜히 머리칼을 손으로 쓸며 웃어 보였다. 

'매신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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