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주민의 청승맞은 사색
막연히 서촌에 살아보고 싶었다. 풍류를 품은 동네에 머물면 어쩐지 삶이 윤택해질 것만 같아서. 서촌은 북악산과 인왕산, 청와대와 경복궁을 끼고 있는 우리나라 중심지. 교통편과 치안 등 핵심 인프라를 두루 갖춰 서울에서도 알짜배기 땅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는 최근 이 동네에 이사 왔다. 오피스텔에 살며 누리던 쾌적한 삶을 되감고, 고시원 시절을 복기할 만큼 오래된 집에 산다. 이곳이 서울의 번화가라는 사실과 나의 20대 초반 풋풋함을 오롯이 담고 있다는 점이 선택의 이유였다. 나의 희비와 명암 전부.
학부 시절부터 광란의 밤과 거리가 멀었던 나는 고즈넉한 동네를 찾아다녔다. 그 가운데 특히 서촌과 북촌을 방앗간처럼 자주 들렀다. 혈기왕성한 에너지를 클럽과 감성 주점에서 끼를 발산하는 데 쓰지 않고 찻집과 밥집을 오가며 걷고, 또 걷는 데 비축했다. (끼가 없었나?) 디자인 전공자로서 크고 작은 갤러리가 포진한 이 지역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북촌에 자리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생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양질의 전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방문 이유였다. 데이트도, 혼자 놀기에도 북촌과 서촌 코스 하나면 충분했다. 서울 핫플을 비교적 한산한 시간에 방문할 수 있는 학생 특권을 제대로 누린 셈이다.
행복한 추억만 있는 건 아니다. 생각해 보니 고독한 마음일 때 이 동네를 더 찾았던 같다. 심히 괴로울 때는 굳이 집 근처 뒷산을 두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끝끝내 이곳에 왔다. 엄마와 나를 두고 돌연 세상을 등진 아빠가 그립고, 가슴에 바위가 들어앉은 듯한 기분을 느낄 때는 북악산에 오르내리며 먹먹한 심정을 달랬다. 아빠는 거리에서 숨을 거뒀다. 내 인생 첫 장례식이었다. 사람들은 네 아빠 참 좋은 사람이었단다. 엄마에게는 다소 소홀했던 그는 밖에서 참 잘하고, 잘 쓰고 다녔다는 게 부조금에서 드러났다. 아빠가 운영하던 회사 정리는 남겨진 이의 몫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저분하고 추악한 어른들의 일면을 봤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익숙한 일은 아니었다. 어려운 일도 거뜬히 넘기는 청년이면 좋았으련만, 나는 이따금 사람보다 술에 더 크게 의지했으며 악몽이 두려워 수면제에 의존했다. 그리고 지금은 천천히 극복하고 있다.
이렇듯 인생을 단막극 3부작에 비유하면 채 1막이 열리기 전에 본능처럼 이 지역에 발자국을 찍어 온 셈이다. 10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방문객이었던 지난날과 달리 거주자로서 이 지역을 바라보게 됐다는 것. 거두절미하고 살기에 탁월한 동네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물론 내 재정 상태와 성향이 반영된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다. 일단 부잣집 자식이거나 벌이가 또래보다 상위권이 아니라면 앵겔 지수가 높은 편이라 생활비가 많이들어 부담스러울 것이다. 시장도 식자재 위주로 고루 다루기 보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음식에 편중됐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밖에도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북적이는 거리를 감당할 인싸력도 갖춰야 한다. 일견 수수한 동네처럼 보일지라도, 거리를 채운 사람들은 양껏 가꾸고 들뜬 이들로 가득하다는 점을 간과했다. 솔직히 가끔 기 빨린다. 물론 도심에서 흔치 않게 탁 트인 스카이라인과 아름다운 풍광, 인근의 갤러리와 잡화점, 카페 등 다양한 콘텐츠를 품은 상점이 즐비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동네에서 느껴지는 정취와 특색이 분명하다. 무색무취 빌딩숲인 서울에서 분위기가 뚜렷한 지역은 손 꼽는다. 지금은 이걸 양껏 누리는 중이다.
이 동네에 둥지 튼 지 채 반년이 안 됐지만, 나는 안다. 내가 계속 이곳에 살지 않을 것임을. 내 인생의 2막과 3막 사이 어느 지점에 잠시 머무는 곳임을. 그리고 내가 계속 이곳을 찾을 것이란 걸 잘 안다.
* 사진은 2005년 이래 서촌에서 자리를 지켜온 동네 카페. 숯불로 볶아 내린 커피와 천천히 달여 내린 차를 제공한다. 주인장 취향이 반영된 빈티지 인테리어도 인상적인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