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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용 Aug 26. 2018

30년 다큐 작가 인생

24시간 다큐 온에어

# 29년간 방송 작가네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지원(이하 한) : 반갑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 제가 감사하지요(웃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한 : 저는 한지원입니다. 90년부터 방송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29년 간 방송 작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주로 다큐멘터리 분야를 맡고 있어요. 

29년이면 거의 한 청년의 일생에 준하는 시간이네요. 

한 : 네. 제 청춘을 보냈습니다(웃음). 

그렇다면 방송 작가가 첫 직업이면서 현 직업인가요? 

한 : 첫 직업은 아니에요. 대학생 때 1년 정도 연극을 했어요. 연극을 투신하겠다고 마음먹고서 극단에 들어갔어요. 1년 정도 극단에서 일을 했는데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막내 일을 못 견뎠던 것 같아요. 나는 더 배우고 싶은데 선배들은 ‘현장에서 일하면서 터득해’라고 하며 직접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 기간을 견디지 못해서 1년 만에 극단을 나왔어요. 그 이후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 작가교육원을 6개월 동안 다니고서 작가가 됐습니다. 



극단에서의 막내와 막내 작가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한 : 다르지 않았어요(웃음). 그런데 이번에 또 그만두면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어요. 내가 4년 동안 연극에 투신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1년 만에 포기했다는 사실이 트라우마로 남아서 또 포기하면 실패자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버텼어요. 정말 열심히 버텼어요. 

29년 동안 버티게 됐군요(웃음). 

한 : 네 29년 동안 버텨 오고 있어요(웃음). 


긴 시간 작가로 일해 오면서 손에 꼽기 힘들 만큼 많은 작품에 참여를 했을 텐데, 대중들이 알 수 있을만한 대표작은 무엇이 있나요? 

한 : ‘VJ 특공대’를 처음 기획해서 3년 동안 자리 잡도록 했어요. ‘인간극장’도 대표 프로그램이고, ‘그것이 알고 싶다’에도 참여했어요. 국수를 통해서 문명사를 이야기하는 ‘누들 로드’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하 다큐)도 있어요. 문화 분야 프로그램도 작업했어요. ‘명작 스캔들’, ‘장영실쇼’와 같은 프로그램도 했고 지금은 ‘다큐 시선’이라는 프로그램을 맡아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위 이미지 모두 한지원 작가가 참여한 대표작들


# 진짜 방송 작가는 어떤 모습인가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방송 작가의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화려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현업 방송 작가로서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고 보나요? 

한 : 왜 화려해 보이는지 모르겠지만(웃음). 정말 막일 예요. 특히 다큐멘터리 분야는 촬영량이 어마어마해요. 인간극장을 맡았을 때 예전 6mm 테이프로 100개쯤 찍어요. 이 100개의 테이프를 보지 않고는 구성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날이면 날마다 편집실에 붙어있었어요. 지금이야 파일로 열어볼 수 있는데, 당시에는 편집실에 있어야 녹화된 영상을 볼 수 있었던 거예요. 편집실 귀신이 돼요(웃음). 계속 영상을 보면서 ‘이 사람에게 더 집중하자’, ‘이 갈등이 더 중요해’라고 디렉팅을 해야 되죠.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예요. 다큐멘터리는 더 심하죠. 


 드라마 작가가 돈도 잘 벌고 굉장히 화려한 직업으로 생각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매일의 시청률 경쟁도 치열하고 드라마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어요. 전형적인 피라미드 구조예요. 하고 싶은 사람은 정말 많은데 기회가 적은 거죠. 그러다 보니 그 안에서 암투도 많고 질투도 많고 장난 아니더라고요. 그들 역시 외부에 비치는 모습처럼 화려하지 않아요. 


말 그대로 프리랜서 형태로 일 하고 있기에 경력 초창기에 불안감을 크게 느꼈을 것 같습니다. 

한 : 정말 컸어요. 지금도 커요. 저보다 일 많이 하는 사람이 없다고 자부할 만큼 일 많이 하는데도 불안해요. 다음 일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또 다른 형태의 불안함도 있어요.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하고 애정을 쏟아서 만든 프로그램이 나의 콘텐츠가 아니라는 점. 지금까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면서 제가 만든 프로그램 덕분에 유명해진 사람들도 많거든요. 제가 그 사람들을 탐색하고 발굴해서 스토리를 이끌어내어 방송에 담았지만 내용은 그 사람의 콘텐츠인 거예요. 거기에 저는 없어요. 이런 공허함이 있죠. 더군다나 방송은 한 번 방영되고 나면 산화되잖아요. 이런 부분에서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어요. 


이런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어떤 활동을 시도하고 있나요? 

한 : 제가 취재했던 내용들에 대한 취재기록을 글로 남기기도 하고 강연도 하고 있어요. 제가 방송을 제작하며 느꼈었던 점들. 진심은 어떻게 전달되는지, 진정성이 무엇인지, 감동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저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어요. 이런 형태로 저의 콘텐츠를 축적하고 있어요. 


위 사진 모두 한지원 작가가 집필한 도서들


약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 분야에서 한 직업으로 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한 : 재밌어요. 방송이 재밌어요.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인생을 발굴하고 재구성해서 그 사람만의 의미 있는 가치를 찾아내 주는 일. 휴먼 다큐 이외의 일반 다큐도 의미 있어요. 근래 작업한 프로그램 하나는 간도에 관한 이야기예요. 간도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많이들 알고 있지만 모르고 있는 부분이 더 많아요. 저도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독립운동, 간도 학살,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등 큼지막한 사건들만 알고 있었죠. 실제로 가보니 묘비가 있어요. 사형제가 같이 죽고 마을 사람 서른 명이 같이 죽었다고 해요. 이렇게 감춰진 이야기들을 제 의도와 감정을 담아 전달하고 나면 그렇게 보람찰 수가 없어요. 
 

 제가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방송 작가가 좋은 직업은 아니에요. 그런데 좋은 일이에요. 바보같이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조금씩 나만의 작품을 만들면서 업그레이드를 해가요. 실제로 몇몇 후배들은 교수가 되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도 있고. 계속해서 발전해 가는 재미도 있어요. 

 시대와 기술이 빠르게 변하잖아요. 요즘 보이는 영상들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제일 못 만드는 것 같아요(웃음).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 흐름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만들어야 하는데’라는 아쉬움도 어느 정도 있어요. 그럼에도 일 하는 것 자체로 힘이 나요. 천성인 것 같아요(웃음).



방송 작가로서 갖춰야 하는 자질 중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 : 호기심.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호기심. 우리 사회에 왜 저런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 저 사람은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한 호기심. 호기심에서 문제 해결의 답이 나오기도 하고 호기심이 생겨야 재미가 있거든요. 

 이와 관련해서 고민해오고 있는 생각이 있어요. 노동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은 맞는데 노동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 있어요. 노동 환경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는 창작자이기 때문에 에너지를 시간에 맞춰서 쓰기 어려운 거죠. 이런 딜레마가 있어요.


 남 일처럼 일하는 친구들을 싫어해요. 보조적인 일만 하다 보면 보조적인 입장에서만 생각하게 되거든요. 본인에게 가장 손해라고 생각해요. 주인 의식이 없는 일은 재미없잖아요. 내 의견을 가지고 스토리를 만들어야 재밌지. 요즘 젊은 막내 작가들에게 ‘이 작업 좀 부탁해’라고 하면 처음 물어보는 질문이 이거예요. ‘언제까지 하면 돼요?’. 이 프로그램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그저 업무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 해지더라고요. 자기 일처럼 하는 태도의 근원은 호기심인 것 같아요. 


# 앞으로는 어떤 모습일까요


후배를 양성하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현재 어떤 형태로 교육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소개 부탁합니다. 

한 : 현재 작가 교육을 계속하고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제가 하고 있는 일, 직업의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방송 작가가 아니라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조금 더 넓은 범위로 규정하고 나서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같은 맥락에서 콘텐츠 크리에이터 후배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죠. 꼭 TV 분야가 아니더라도 본인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게끔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하고 있어요. ‘TV만 바라보지 말고 딴짓해라’라면서 딴짓할 수 있는 방식들을 알려주고 있어요.



 여러 모습들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제가 강연을 다니거나 세미나를 개최하는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후배들이 ‘선배들은 저렇게 새 길을 여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저 새 일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방송 작가도 다방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요. 소명감이 있어요. 제가 여기서 은퇴하고 그만두면 후배들도 ‘나도 저 나이가 되면 할 일이 없어지는구나’라고 생각할 테니까. 거꾸로 ‘저렇게 열심히 일 하니까 다른 길이 열리는구나’를 직접 보여주고 싶어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한 : 크리에이터로 생존하는 것.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꿈이 되었겠네요. 

한 : 네. 방송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기보다 내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업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는 저도 초보라서. 


기성세대는 청년들이 의욕이 없다고 비판하고, 청년들은 시대가 바뀌었다며 세대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30년 간 청년의 시기부터 중년이 되기까지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며 이와 같은 세대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 : 기본적으로는 청년들을 응원해요. 자기 나름대로 사는 것. 저조차도 일반인들이 살지 않았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개척해왔기 때문에 청년들이 개척하는 정신으로 도전하는 것은 응원해요. 다만 이런 부분도 같이 고려하면 좋겠어요. 어떤 목적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손해보고 더 노력해야 하는 때가 분명 있다는 사실. 이 태도는 놓치지 않고 열심히는 살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재면서 접근하지 않았으면. 이때는 투자하고 몰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올인해보는 용기는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시대가 변했다는 말에 기대서 열정을 쏟는 일까지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꿈을 꾸기 힘들고, 꿈이 있더라도 실행으로 옮기기 힘든 시대에 힘들어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조언과 응원의 한 마디 부탁합니다. 

한 : 꿈을 꾼다고 해서 현실이라는 땅에 붙이고 있는 발을 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꿈을 꾸면서 현실은 도외시한 채 꿈만 꾸고 있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 꿈을 이루는 곳은 땅이거든요. 아무리 조언을 해줘도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닌 건 아닌데. 상업적인 문화가 주입되면서 만들어진 꿈과 진짜 본인의 꿈을 구분해야 하는데. 두 가지 꿈을 구분하는 것이 땅에 발을 딛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응원하면서도 걱정되는 부분이 이거예요. 꿈을 꾸면서도 땅에 붙인 발을 떼지 않았으면 좋겠다. 되게 얄밉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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