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은 돌고 돌아
8시간은 잔 것 같은데
몸이 무거웠다.
정신 감기몸살은 생각보다
무서웠다.
눈을 뜨고 있는데 졸려웠다.
졸려서 눈을 감으면 말똥거렸고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과 계획했던 일을 하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나는 그냥 집에 남기로 했다.
그쯤 전날에 했던 또 다른 약속이 생각났다.
첫 차를 뽑은 직원에게 운전 연수를 시켜주기로 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원장님, 드라이브 가실래요?"
"나 대표님이랑 나가려는 것도 못 나갔어. 밖으로 나가는 건 힘들 것 같고 어차피 점심은 먹어야 하니까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점심 먹을래?"
"좋아요."
그렇게 나는 점심약속을 잡고
양치를 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더니 몸이 좀 깨어나는 것 같았다.
마침 직원이 도착했고 그녀를 집안으로 들였다.
고양이들을 매만지며 빨리 온 것 같지 않냐며 들떠있는 직원의 음성.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 음식 배달하지 말고 포장해다가 먹을까? 그럼 오고 가며 운전연습도 되고. 어때"
또 좋단다.
나는 계란 한 판을 핑계 삼아 스타필드로 갔다.
스타필드의 평일은 한산해서 주차연습하기엔 제격이다.
몇 번의 주차연습을 시킨 뒤 우린 트레이더스에서 먹을만한 음식들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매장 주차장으로 가서 주차연습을 몇 번이나 더 했다.
긴장한듯하지만 설레어하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귀여웠다.
나는 내가 무언갈 도울 수 있는 사람인 것에 감사했고,
그녀는 차를 샀더니 진짜 어른이 된 것 같다며 어깨를 추켜올렸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남편이 먹을 음식을 덜어놓고 드라마하나를 틀어놓은 뒤 수다를 떨며 다섯 시간가량 혼자서 일품진로 반 병과 지평소주 한 병을 비워냈다.
원래라면 충분히 취기가 올라 블랙아웃 전 이어야 마땅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정신은 말짱했다.
그 사이 일을 마친 남편이 돌아왔고 남편은 밖에서 있던 불편한 일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매장에서 걸려온 전화로 매장일을 보러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장 인터넷이 문제인지 전화가 안 오고, 히터도 안 나온데. 오늘 힘든데 진짜 짜증 나네. 가기 싫다."
나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응원밖에 해줄 길이 없었다.
"힘내 여보."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 직원이 돌아갈 시간이 됐을 무렵 나는 갑자기 어렸을 적 퍼먹었던 동생의 분유맛이 떠올랐다.
기억은 내 생각뿐 아니라 입맛까지 지배하는 것일까?
낮에 쓰레기를 버리려다 50L 쓰레기봉투가 없던 게 생각나 겸사겸사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분유한통만 사다 줄수있어? 50리터 쓰레기봉투 한묶음이랑."
"분유? 무슨 분유? 갑자기 웬 분유?"
"그냥 갑자기 먹고 싶어서 그래.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애기들이 먹는 분유 사다 줘."
남편의 황당한듯한 알겠다는 대답으로 분유를 기다리면서 직원을 보냈다.
그리고 곧 남편이 돌아왔지만 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고 그 짜증 난 얼굴로 이내 큰 소리를 냈다.
"아니 뭔 갑자기 분유야? 세 군대나 가봤고 큰 마트도 가봤는데 분유를 안 판데.
나 오늘 힘든 거 알면서 꼭 그렇게 뭘 사 오라고 시켜야겠어?"
마트에서 분유를 안 팔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럼 애 엄마들은 분유를 도대체 어디서 산다는 말인가.
남편은 손에 든 쓰레기봉투와 두툼하게 꽉 차있는 까만 봉지를 툭하고 던져 내렸다.
이 사람은 나에게 서운한 것 같았다.
단순한 심부름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끝내 분유를 사 오지 못했다는 실패의 마음과 본인의 힘듦을 이해하지 않았던 내가 원망스러운 듯 보였다.
"당신이 좋아하는 김치 만두 사 왔어, 만두 먹어."
나는 변명하려고 하던 입을 다물고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해 힘들었을 텐데, 갑자기 그게 왜 먹고 싶은 건지 나도 모르겠네. 쿠팡으로 시킬게."
남편은 변했다.
원래라면 5절까지는 더 했어야 했는데 말을 돌렸다.
또 다른 직원이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어 한다는 말이었다.
"오라고 해?"
"당연하지."
평소 같았음 이런 분위기에 누구도 만나지 않았을 우리였다.
우리는 변했다.
직원이 놀러 왔고 우린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떠들며 만두를 해치웠고 10시쯤 되어서 나는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은 눈치껏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렇게 또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