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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는 언제 오는가

이미 지나갔을까, 아직 오지 않았을까, 혹은 아예 없는 것일까

by 세이지SEIJI

며칠 전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흥미로운 포스트를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20대를 인생의 전성기라고 여기지만, 실은 인생의 전성기는 60대다"라는 내용이었다. 스크롤을 멈추고 한참을 그 글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흔 초반인 나는 어디쯤 와 있는 걸까. 내 인생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간 것인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없는 것인가.


전성기라는 말의 무게

보통 "전성기"라고 하면 유명 배우가 한창 잘나갔을 때, 스포츠 선수가 최고의 기량을 보였을 때를 떠올린다. 확실한 커리어의 정점, 대중의 주목, 눈부신 성취. 그런 뚜렷한 구분점이 있는 삶 말이다. 하지만 일반인의 삶에는 그런 명확한 기준점이 없다. 우리는 조용히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고, 어느 날이 특별히 "전성기"라고 불릴 만한 날은 없다.

그렇다면 그 인스타 포스트가 말하는 20대와 60대는 무엇을 기준으로 한 걸까. 나는 자연스럽게 내 20대를 돌아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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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정말 전성기였을까

지금보다 젊고 예뻤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직 어렸기에 근거 없지만 어느 정도 희망을 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부모님도 지금보다 훨씬 젊고 건강하셨다. 학교든 뭐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 소속감은 나름의 안정감을 줬다. 2002년 런던행을 결정하고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돌이켜보면 그 나이였기에 가능했던 순진함과 열정 덕분이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그때가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이 더 나은 것들도 분명히 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의 크기와 깊이가 달라졌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고, 나 자신에 대해 파악한 것들이 많아졌다. 가정사에 덜 얽매여 살게 된 것도 지금이다. 런던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그 경험 자체보다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어림'이 가능했던 시절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선택들

10대와 20대를 돌이켜보면, 진짜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때가 있다. 지금보다 덜 성숙했거나 좀 더 본능적이었던 기억들. 혼자 낯뜨거워할 때도 있다.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캠퍼스에서 서로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한 달여간의 시간 동안 연인으로 지냈다. 그런데 그해는 우리 집 반려견이 13살 되던 해였고, 그게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해였다는 걸 나는 몰랐다.

그 친구는 11월 17일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와 나는 다가오는 이별의 순간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떠나기 전날 밤, 반려견이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져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밤 12시에 임종을 보고, 우리 가족은 다음 날 묻어주기로 했다. 하필 그날은 교환학생 친구도 한국을 떠나는 날이었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반려견의 장례와 그 친구와의 마지막 이별 인사 중에서. 결국 나는 학교로 가서 그 친구와 작별 인사를 했다. 반려견이 떠나기 전 몇 주간은 내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임종을 맞이한 날 아침 학교 갈 준비를 하면서도 제대로 안아주지 못하고 집을 나섰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걸리고 후회된다.

그때는 두 가지 일이 모두 너무 절절했다. 지금의 나였으면 당연히 반려견과의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연인은 지나가는 인연일 수도 있지만, 반려견은 내 자식 같은 가족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순간 무엇에 더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정답은 없다.

20대에는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가 많았기에 지금과는 가치를 두는 것들이 달랐다. 지금은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것도 그때에는 중요했다. 지금 보면 조금 어리석어 보여도 그때의 나로서는 나름 최선을 다했던 순간들.

그런 기억들을 떠올릴 때마다 깨닫는다, 시간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내면도 이렇게 계속 바꿀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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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를 정의하는 기준

결국 전성기라는 개념 자체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단순히 외모나 건강, 체력으로 따지면 인생의 전성기는 10대에서 20대가 맞을 것이다. 반면 내면의 성숙함, 삶에 대한 이해, 관계의 깊이로 따지면 중년 이후가 전성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각자의 삶이 다 다른데, 인생의 전성기는 언제라고 특정 짓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 걸까. 사람이 살다 가는 수명도 제각각인데, 언제가 전성기일 거라고 미리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쩌면 지나고 나서야 "그때가 전성기였다"고 유추해볼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라는 착각

전성기라는 개념이 위험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생을 "오르막-정점-내리막"이라는 단선적 구조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정점 이전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시간이 되고, 정점 이후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 된다. 그렇게 되면 현재를 온전히 살기 어려워진다.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거나,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삶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걸까. 내가 20대의 나를 돌아보며 느낀 것은, 그때와 지금이 단순히 "더 나았다/못했다"로 나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때가 나았고, 어떤 면에서는 지금이 낫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각 시기마다의 조건과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어쩌면 삶은 정점을 향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포물선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 변화가 때로는 성장처럼 보이고, 때로는 퇴보처럼 보일 뿐.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삶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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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없는 삶

만약 전성기를 "남들보다 잘 나가거나 사회적으로 두드러질 정도의 업적이나 성취"라고 정의한다면, 인생에서 전성기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 전성기의 정의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정의에 따라 그 시기가 언제인지도 달라질 것이다. 만약 그런 정의를 굳이 내리지 않는다면, '전성기 없는 삶'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그게 이상한 것도 아닐 것이다.

혹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만약 '전성기'의 정의를 삶을 충분히 느끼고 깨닫는 순간들이라고 친다면 어떨까. 각 나이대마다 삶을 느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다르다. 20대에는 20대의 방식으로, 40대에는 40대의 방식으로, 60대에는 60대의 방식으로 삶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그때그때 주어진 나이와 조건들에 맞게 삶을 충분히 느끼고 살아낸다면, 매 순간이 전성기가 아닐까.

조금 이상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나간 20대를 아쉬워할 필요도, 오지 않은 60대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느끼고 살아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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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성기는

그럼 나는 어떤가. 내가 내리는 전성기의 정의는 무엇일까. 그걸 먼저 생각해봐야겠다. 어쩌면 그 정의를 내리지 않는 것, 그 자체가 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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