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의 미
집에서 밥을 해 먹으며 늘 갖춰 두는 평범한 부재료를 하나씩 떠올려 본다. 너희가 변함없이 곁을 지켜 주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어, 하는 마음으로.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주방 내 그들의 위치가 그려진다. 다섯 가지 향신료 역할의 채소—마늘, 생강, 고추, 파, 양파—와 필수 양념 몇 가지, 그리고 건해물과 해조류.
뭔가를 요리한다고 할 때 마늘을 안 쓰는 경우가 거의 없지 싶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 아니라는 얘기를 N과 자주 나눈다. 상추에 고기나 생선회 싸 먹을 때 보면 마늘 넣은 쌈장에 또 마늘을 찍어 얹기까지 하니.
마늘은 껍질 까기가 번거롭다. 반찬통에 껍질째 넣어 뚜껑을 덮어 마구 흔들면 껍질이 말끔히 벗겨져 나오는 동영상을 여러 번 보았지만, 그냥 다진 마늘과 깐 마늘을 산다. 학창 시절에는 통마늘을 사서 껍질도 까고 직접 절구에 빻을 만큼 기백이 넘쳤는데….
다진 마늘은 위생백에 넣고 넓게 펼쳐 칼등으로 격자 모양 초콜릿 긋기 처리를 하여 빳빳한 데 올려 얼린다. 구독 중인 <서울사랑> 매거진이 작고 얇아서 거기 얹어 냉동실 위칸에 넣어 둔다. 단단히 얼면 꺼내 한 조각 한 조각 분리해 다시 통에 넣는다. 최근에는 인터넷에서 버터 잘라 얼리기 팁을 보고 다진 마늘에 응용했는데, 조각 하나를 쌀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종이 포일을 잘라 하나씩 감싸는 것이다. 그런 후 차곡차곡 겹쳐 넣으면 서로 달라붙지 않고, 요리할 때 꺼내면서 마늘이 손에 묻지도 않아 좋다. (나와는 성격이 사뭇 다른 N이 국을 끓이면서 그렇게 얼려 놓은 마늘을 보더니 “미쳤네-“라고 했다. 칭찬이겠지?)
생강은 고기나 생선 요리할 때 필요하니 작게 잘라 냉동해 둔다. 한때는 다진 생강을 샀지만 생강청을 담그기 시작하고부터는 그때 몇 알 빼서 요리 용으로 보관한다. 생강은 물에 씻어 숟가락으로 긁으면 껍질을 쉽게 벗길 수 있다고는 하나, 쉽지는 않다. 그냥 칼로 다듬으며 까는 게 나는 더 편했다. 하긴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어? 귤껍질 정도나 되어야 벗기기 쉽다고 말할 수 있다.
고기 삶을 때 넣었다 건져내는 용도가 아니고서는 음식에 큰 조각을 넣었다가 감자나 다른 건 줄 알고 씹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알기 때문에, 생강은 최대한 작고 가늘게 썰어 사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강한 생강 맛도 즐긴다. 진하게 우린 생강차, 일식집에서 먹는 초절임 생강인 얇고 넓은 ‘가리’와 채 썬 핫핑크 빛의 ‘베니 쇼가’* 모두.
* 일본인 친구에게 일어를 배울 때 일본인이 운영하는 스시집에 갔다가, 나름 배운 일어를 써 본다고 ‘베니 쇼가’를 달라고 했더니 셰프가 내가 원하는 것은 ‘가리’라 불린다고 알려 주었다.
고추는 청색 홍색 두 가지를 구비해 놓는다. 홍고추가 없으면 찌개 끓일 때 사진발이 안 받기 때문에. 미국에서 살 때는 할라피뇨와 말린 태국 홍고추를 상시 저장해 두었다. 할라피뇨는 청양고추와는 생김새도 다르거니와 약간 다른 종류의 매운맛을 지녔지만 가장 좋은 대체제였다고나 할까. 각종 찌개와 볶음은 물론 맑은 조개탕이나 소고기 뭇국에 꼭 넣어 얼큰한 국물을 완성하던 기억이 난다. 태국 고추는 볶음요리 재료와 고명으로 자주 썼다. 한때 고추의 매움에 중독되어서 언뜻 보기에 전체적으로는 붉은색—고춧가루나 고추장으로 만든 양념처럼—을 띠지는 않지만 막상 맛보면 매운, 그런 음식을 자주 해 먹었다. 착해 보이는 햄 감자 볶음밥인데 먹다 보면 혀가 얼얼한.
지금은 풋고추와 잘 익은 홍고추를 산다. 이제 밖에서 매운 음식을 훨씬 자주 접하게 되어 그런지, 청양고추는 집에 잘 두지 않는다. 고추는 씻어서 통째로 얼렸다가 요리할 때 꺼내 흐르는 물에 한 번 쓱 해동하여 가위로 잘라 쓴다. 어슷 썰기는 비스듬히 들고 자르면 되고, 양념장 만들 때처럼 좀 작게 썰어야 할 때는 꼭지를 잡고 먼저 세로로 길게 가른 뒤 다시 가로로 쫑쫑 잘라 주면 된다. 나는 가위로 재료 썰기 프로.
파는 쪽파를 산다. 미국에서 사던 습관 때문인데, 근처 식료품 마켓에서 Green Onion 혹은 Scallion이라고 하는, 사이즈 면에서 쪽파와 비슷한 그 파를 가장 구하기 쉬웠다. 한국에서는 대파를 쉽게 살 수 있는데도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간다*. 어쩐지 너무 크다. 그래서 국에도, 다른 요리에도 쪽파를 자주 쓴다. 쪽파는 씻고 뿌리를 잘라낸 후 길이의 절반 혹은 통에 들어갈 만큼의 길이로만 잘라서 냉동한다. 예전에는 어슷 썰기까지 해서 얼려 요리할 때 조금씩 집어넣었는데, 그러면 (얼면서) 서로 엉겨 붙기도 하고 (썰 때) 눈물도 흘려야 하니까 그러지 않기로 했다.
*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쪽파만 먹다가 요즘 대파 맛에 빠졌다.
고추와 마찬가지로 냉동해 둔 파를 자를 때는 거의 가위를 이용한다. 가끔 초록색 색감이 필요할 때 아주 잘게 잘라 데코 용으로도 쓴다. 어느 해에 갑자기 쪽파에 꽂혀서 흙 묻고 거대한 한 단을 사 와 파김치를 담갔다. 씻는데 하세월, 다듬는데 하세월. 거의 수련하듯이 김치를 담그고 또 통에 가지런히 줄 맞춰 넣는데 하세월이 걸렸다. 파김치를 담그면 나도 파김치가 될 수 있다.
양파는 맛있지만, 껍질 깔 때와 썰 때 조금 밉다. 맨 겉껍질부터 흰 양파 살 바로 위 껍질까지 과감하게 틈을 잡아 벗기면 그리 어렵지는 않은데, 성격이 원체 대범하지 않은 데다 깔끔 떤다고 조금씩 잡다가 한번 결을 잘못 타면 껍질이 아주 조금씩만 뜯기다 부서져서 괜히 심통이 나곤 한다. 그런데도 깐 양파는 잘 안 사는 묘한 심리. 썰 때는 기어이 나를 울려서 밉다.
생양파는 알싸한 맛을, 익은 것은 특유의 단맛을 내니 여기저기 쓸 데가 많은데, 나는 썰어서 찬물에 잠시 담가 매운 기를 뺀 생양파를 좋아한다. 샌드위치나 샐러드에 넣거나 고기 먹을 때 접시에 깔아 곁들이면 예쁘고 아삭하다.
또한 나는 양파의 모양이 재미있다. 까도 까도 또 나온다는 식으로 양파에 대해 많이 얘기하지만, 그렇게 한 겹씩 벗기면 계속 같은 구조일 뿐인 걸? 내가 생각하는 양파의 매력은 얇게 썰어야 할 경우에 가로로 썰 때와 세로로 썰 때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난다는 점이다. 오징어처럼 링 모양으로도 쓸 수 있다는 것하고.
소금, 후추, 된장, 간장, 고춧가루, 참기름, 깨, 식초, 설탕, 식용유는 꼭 있어야 하는 양념 열 가지. 장류 중 딱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간장. 간장을 이용한 요리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는 음식에 간장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게 정확할까? (예: 잡채) 하지만 된장도 쓰임이 많아 없으면 곤란하다. 후추는 없어도 큰일까지는 나지 않지만 통후추를 그라인더로 갈아 요리에 뿌리면 기분이 업 되기 때문에 1순위. 깨는 맛만 생각하면 필수는 아닌데 형식미가 중요하므로 1순위.
매실청과 고추장은 집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고추장은 미국 살 때는 집에 꼭 두던 양념인데 오히려 한국에 살면서는 소중함이 조금 퇴색됐다. 밖에서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들기름, 들깻가루, 물엿, 액젓, 겨자, 고추냉이, 파슬리나 바질 가루는 특정 요리에 필요해 샀다가 꽤 긴 기간 남아 있게 되는 류.
버터, 마요네즈, 핫소스 등은 기분에 따라 구입한다. 올리브유는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N의 회사에서 계속 카놀라유, 포도씨유 등 식용유가 든 명절 선물세트를 주는 바람에 뭔가 오일 과잉 같아 잊고 지내다가 이번에 샀다. 명절에는 간장 세트를 주면 좋을 텐데.
마지막으로 바다에서 온 마른 친구들 4인방. 멸치, 다시마, 미역, 김. 멸치와 다시마는 맛국물 내기 기본 세트니 긴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이 둘을 중심으로 필요에 따라 재료를 추가해 국물을 우린다. 미역과 김은 모든 해산물을 통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식재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미역국은 생일의 상징이어서인지, 그냥 그 맛이 좋은 건지, 국 중에 딱 하나만 고르라면 미역국을 고르겠다. 여러 버전 중에서는 소고기 미역국이 가장 좋다. 뭉근하게 끓여 부드러워진 미역을 듬뿍 떠서 밥을 말아먹으면 보양식을 먹은 기분이다. 미역이 우러나 뽀얘진 국물에 녹아든 참기름과 마늘의 향도 좋고. 집에서 해 먹는 미역이 주가 되는 메뉴는 끽해야 미역국과 오이 미역냉국 정도인데, 건미역이 떨어지면 불안하다.
김은 정말, 그걸 처음 채취해서 납작하게 펴서 말려 반찬으로 먹기 시작한 사람은 천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기름과 소금을 바른 조미 김은 조미 김대로, 바싹 구워 간장을 찍거나 그냥 먹어도 좋은 맨 김은 맨 김대로 포기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엄마가 납작한 붓으로 김 한 장 한 장에 삭삭 기름칠하던 소리를 아직 기억한다. 아빠가 구운 맨 김은 특별히 바삭하고 고소하다. 반찬도 간식도 안주도 고명도 되는 만능. 김치는 없어도 김 없이는 못 살 것 같다. 김 씨라서 그런가?
쓰다 보니 하나하나 설명이 길어져 빼먹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밥 해 먹는 한국인의 주방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아이템들이라 쓸 얘기가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살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마늘”을 먹었을까? 따옴표 자리에 위에 적은 다른 어느 재료를 대입해 보아도 가늠은 어렵다. 다들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이 글을 쓰면서도 구워서 잘라 놓은 김 한 통을 비웠다.
Se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