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마특선 2] “짠” 하며 잔을 부딪치는 건배

호텔 마카다미아 특선 2 - 레몬 진저 탄산수

by 세상 사람


‘술을 끊으면, 시시하고 재미없는 사람인 채 살게 되면 어쩌지?’

내심 그게 걱정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술을 그런 식으로 자주 이용해서다.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 한 명이 어느 밤 파티에서의 나를 유심히 보더니 다음날 내게 “평소에 낮에도 좀 마시고 다녀” 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술이 좋았다. 술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때로는 혼자 가는 단골 바가 있는 것만으로. 알록달록 반짝이는 네온도, 자동으로 분위기 있는 필터를 먹여 주는 은은한 조명도. 안주와 술의 궁합을 찾는 일도, 술벗과 놀거리를 좇는 일도. 술이 들어가면 평소에는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속 얘기를 남 얘기처럼 툭 꺼내 놓기도 수월했는데, 그러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서 다 같이 불쑥 가까워지는 착각이 드는 점도 재미 중 하나였다. 내일 생각 따위 접어 두고 테이블 위에 초록 병—꼭 초록은 아니지만—이 하나둘 쌓이는 걸 보면 뿌듯하고 즐거웠다. (단, 회사에서 억지로 하는 회식 제외.)

생각해 보면 술을 마신다고 해서 더 재치 있거나 쿨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뻔뻔해지고, 약간 관대해지고, 과하게 상냥해질 뿐. 게다가 술에 기대 저지른 실수로부터 오는 후회는 맨 정신으로 돌아온 나의 몫이었다. 여전히 소심하고 여전히 민감한, 내향인 김세인 말이다.








[호텔 마카다미아 특선메뉴] 두 번째 이야기는 ‘레몬 진저 탄산수’다. 혹시라도 특선메뉴라는 코너 명 때문에 레시피를 기대했던 분이 있다면 미안하다, 초장부터 술 얘기만 자꾸 해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술을 끊지 않았다면 이렇게 정성껏 청을 담가 매일같이 레몬 진저 탄산수를 마시지는 않았을 듯하다. 마트에 가면 세계 맥주가 종류별로 얼마나 많은데. 어디 맥주뿐인가.

아, 오해는 말길. 지난 화에 쓴 것처럼 금단 증상—불안이나 불면 같은—은 없었다. 어느 날 확고한 결심 없이 술을 안 마시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그 기간이 길어지자 본격적인 금주에 도전해 본 쪽에 가깝다. 레몬청과 생강청 역시 처음부터 술을 대체할 음료가 필요해 담근 것은 아니었다. 겨울에 감기 걸리면 마시려고 담근 생강차와 레몬차를, 따뜻해지는 봄 기온에 맞춰 얼음과 탄산수에 섞어 마셔 보고는 반해 버린 것.








술을 끊고 ‘뭔가’ 허전함이 있었다. 알코올을 곁들이던 메뉴를 먹을 때면 찾아오는. 정서상의 결핍감이라기보다는 감각적 갈증이랄까. 그걸 메꾸려고 식사 때 콜라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나 시중에서 파는 무알콜 맥주를 함께 마셔 보기도 했는데, 전자는 너무 달고 후자는 어설픈 사기꾼 같아서 금세 물리고 말았다.


그때 마침 찾아온 게 레몬 진저 탄산수다.

레몬은 동그란 모양이 살아있도록 얇게 슬라이스 하여 일대일 분량의 설탕에 켜켜이 재우고, 생강은 껍질을 까고 얇은 채칼에 갈아 역시 동량의 설탕에 재운다. 청을 담을 유리병은 찬물을 부은 냄비에 엎어 넣고 끓여 소독하는데, 뜨거운 병을 건져낼 때 화상에 유의해야 해서 긴장되지만 왠지 내가 목욕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물이 끓으면 병 안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히는데 그때 병을 뜨거운 물에 굴린 후 건져 바로 세워 말린다. 말끔히 물기를 말린 병에 설탕과 재료를 다 섞어 넣고 병뚜껑을 닫기 전 나는 약간의 꿀로 지붕을 덮는다. 처음에는 설탕이 부족해서 그랬는데, 이후 무슨 의식처럼 계속 그리 하고 있다.

탄산수에 넣는 청의 분량은 얼마나 달게 마시고 싶은가에 달렸다. 보통 나는 레몬 슬라이스 한두 조각과 레몬청 생강청 각 한 스푼씩 넣어 너무 달지 않게 마신다. 얼음은 필수.

초반에 탄산수를 만들 때, 매번 레몬청과 생강청 두 개의 병뚜껑을 따로따로 열고 덜어내는 게 귀찮아 레몬 한 켜 저민 생강 한 켜 번갈아 한 병에 합쳐 담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걸로 탄 탄산수는 꽝이었다. 처음 마신 날의 청량함, 레몬 특유의 향긋한 시큼함과 그 속에서 숨바꼭질하는 깊지만 과하지 않은 생강의 쌉쌀함이 적절히 느껴지지 않아 실망한 것이다. 왜인지 그냥 다 같이 씁쓸하기만 했다. 조금 편하자고 절차를 뭉뚱그리면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아는 분이 있다면 알려 주시길.

이후 레몬 진저 탄산수는 N과 나의 단골 메뉴가 됐다. “짠” 하며 잔을 부딪치는 건배가 필요할 때, 좋은 안주를 음미하는 사이사이 잔을 홀짝이는 액션이 필요할 때, 조금 느끼할 수 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 입가심으로, 한참 작업하다가 한 숨 돌릴 때나 늦은 밤 쉬면서 흥미진진한 미드를 볼 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이전보다 시시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어쩌면 그렇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우리나라 드라마만 보면 나오는, 주인공들이 툭하면 취해서 혀가 꼬이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술 마시고 고백하는 등의 장면을 보며 자주 ‘아, 또? 음주 씬 너무 많네’ 하는 생각을 한다. 특히 기싸움이나 벌칙, 혹은 ‘나 이만큼 힘들어’를 표현하려고 독한 술을 큰 컵에 마시거나 연속으로 원샷하는 연출은 그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마치 절대 그래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한다. 친구들과 술 마신 다음날 술병이 나서 기어 다닌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음주 씬 제조기는 바로 나였는데, 그들이 보고 웃어도 할 말은 없다.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사람 만나는 일이 거의 없지만 만나더라도 낮시간을 선호하게 된 것 역시 변화 중 하나다(금전 절약은 덤). 술이 있는 자리라면 분위기 때문에 ‘나도 한 잔만 마실까’ 하는 유혹이 없지는 않지만, 확실히 내일의 두통과 속쓰림이 더 싫어졌다.

언제 또 어떤 심경의 변화로 애주가로 돌변할지 몰라 확언은 하지 않으련다만은, 앞으로는 적어도 취기를 빌려야지만 할 수 있는 행동은 하지 않고 살고 싶다. 그러려면 술 없이도 조금은 더 용감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겠지. 예민한 기질은 어쩔 수 없다 해도.




호텔 마카다미아: N과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별칭. 호마특선 1화 참조.



Seine


keyword
이전 07화무엇이든 어우러지고 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