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하지만 화려한

시장이 반찬

by 세상 사람


시장이 반찬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삼십 년 넘게 잘못 알고 살았다. 그 말을 실생활에서 쓰는 경우를 들어 본 기억이 없고 단지 이런 속담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어느 날.

상품 패키지 조사 차 을지로 방산시장에 나간 걸로 보아 적어도 서른 두세 살(당시 직장에서 상품 디자인을 맡고 있어서 방산시장에 자주 감)이었을 적. 종이, 상자, 봉투, 비닐, 끈 등, 포장재의 모든 것이 한데 모인 시장을 샅샅이 돌며 ‘아, 이래서 반찬을 구하려면 시장에 가라는 거구나’하고 혼자 생각해 버렸다. 사무실에만 앉아 구상할 때는 어느 방향으로 해야 할지 갈피 잡기가 힘들었는데, 실제로 시장에 펼쳐진 온갖 재료를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구체적인 제품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었다.








이 옛말이 나에게 (본의 아니게) 선사한 지혜는 밥할 때도 물론 적용된다.

밥 짓기는 해도 해도 왜 매번 끼니때가 되면 다시 귀찮은 건지. 서울에서 N과 함께 집을 얻어 살면서 집에서 밥 해 먹는 흐름을 타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둘 다 각자의 일을 하고 있어 둘 중 누구도 선뜻 밥할 시간을 내기 쉽지 않은 가운데, 습관을 들이려고 한 일이 ‘집밥 인스타그램 계정 만들기’였다. 싫어하는 일(=밥하기)과 좋아하는 일(=인스타에 사진 올리기)을 하나의 연결 동작으로 만들어 나를 속이는 것이다. 만약 생존을 위해 수학 공부가 필요하다면 아마 나(=수학포기자)는 가장 먼저 공부 인증 용 소셜 계정을 만들 듯. 그렇게 차츰 사진을 올리려고 밥을 했고, 비슷한 음식만 올리면 재미없으니 새로운 메뉴에도 도전했다.

지금까지도 계정을 이어 오고 있는데 처음보다는 많이 발전했지만 요즘도 요리하는 게 신나거나 그렇지는 않다. 한 번 장을 보면 재고가 생기고, 그러면 일종의 사이클이 형성되어 재료 소진을 위해서라도 다음 끼니를 해 먹게 되긴 하는데 자칫 그 리듬을 잃기 시작하면(예: 우리 귀찮은데 족발?) 다음 날 다다음 날이 될수록 번거로움은 배가 되어 밀려오기 마련. 며칠 먹을 분량을 한가득 준비해 놓는 건 또 취향과 상황에 맞지 않아서, 보통은 뭘 해 먹을지 정하는 단계부터가 난관이다.

사 먹을라치면 주변에 갈 수 있는 식당의 후보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100% 흡족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결심하면 그만이다. 우리가 할 일이라곤 좀 걷고, 테이블에 앉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면 먹고, 값을 지불하기만 하면 되니까. 어쩌다 맛이 좀 없더라도 식당 탓을 하면 된다. 하지만 딱히 먹고 싶은 건 없으나 아무거나 먹긴 싫고, 배는 고파오고, 배달이나 밖에서 먹는 음식은 왠지 당기지 않는데, 두 사람이 다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서도 재료가 예산에 맞고 요리법이 어렵지 않은, 뻔하지 않고 경제적인, 그러니까 심플하지만 화려한 그 뭔가 없을까, 하는 복잡다단한 고민의 해결책을 앉은자리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바로 이럴 때, 시장(마트)에 가는 거다. 열린 마음과 빈 장바구니를 들고서. 그러면 언제 한번 먹어 보고 싶었던 청도미나리 마지막 한 봉을 발견하거나, 잠재의식이 욕망하던 키조개 한 박스를 세일가에 득템 하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가장 안전한 옵션인 볶음탕 용 닭 한 마리라도 집으면서 비로소 그날의 고민에 마침표*를 찍는다. 집 근처에 전통시장이 있었다면 구경하는 맛은 더 있었을 텐데 좀 아쉽지만, 동네 마트만 가도 계절마다 바뀌는 제철 채소, 과일, 해산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는 “이거랑 요거 굽고 저건 샐러드로 곁들이자” 하는 식으로 각을 재며 바구니를 채운다. N이 좋아하는 캔커피와 내가 좋아하는 과자도 하나 담고.

그렇다 해서 손에 물 묻히기, 칼질 하기, 불 앞에 서기가 마냥 흔쾌해지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사들고 온 재료에 대한 예의 혹은 사면서 떠올린 완성작에 대한 환상으로라도 한결 가볍게 과정에 돌입할 수 있다. 시작은 반이라는 말처럼, 사다 놓기만 하고 요리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절반은 영영 미완성일 테니(응? 이런 뜻 아니라고?).

* 3~4월이 제철이라는 청도미나리는 돼지고기와 함께 구워 먹으면 아삭과 말캉의 중간 식감이 되면서 향긋하게 고기의 느끼함을 잡아 줌(드라마 보고 따라 해 보았다). 키조개는 손질한 후 찜통에 껍질채 쌓고 작은 버터 조각을 관자 위에 올려 찌면 뽀얗게 우러나오는 국물에 버터향이 스며 일품. 닭은 '닭을 끓여 먹자' 편 참조.








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훑다가 친구 MJ가 올린 다음 글을 우연히 읽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엄마는 서당개를 소당깨로 알고 있었다. 내가 서당개라고 하니 한참 웃다가 듣고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다고 했다. 사전을 찾아보니 소당깨는 솥뚜껑의 방언이었다. 부엌에서 밥 짓는 일하며 귀동냥으로 배워도 삼 년이면 터득한다는 뜻이 된다. 어쩐지 그쪽이 더 타당한 말 같았다.

오랜 속담을 전혀 다르게 알고 있었다는 동질감과 한층 그럴싸해진 풀이도 반가웠지만 어머님께서 원말에 대해 ‘그것도 일리가 있다’며 쿨하게 인정해 주시는 대목이 더 재미있어서 무릎을 쳤다. 한편, 부엌에서 띄엄띄엄 밥을 짓고 있는 나는 음식 사진 찍기 스킬이 늘어만 가고….

그 시장이 그 시장이 아니라는 걸 정확히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내 해석도 꽤 근사하지 않은지. 배가 아무리 고파도 정말 맛없는 건 맛이 없지만, 막막할 때는 일단 재료가 있는 곳으로 가면 생각지 못한 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Se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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