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유
어릴 때 무슨 이유에선지 요리책 보기를 좋아했다. 먹기와 요리하기에 남다른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니 ‘요리책의 구성’에 구미가 당긴 게 분명하다. 매 페이지에 인쇄된 일련의 컬러 사진, 다채로운 식재료의 이름과 계량 단위의 나열부터 형태와 색깔이 나뉘고 합쳐지는 과정, 도마 칼 뒤집개 국자 체 프라이팬 냄비를 거쳐 변신을 마친 요리가 그릇에 오르기까지의 숨막히는 전개, 완성작이 뽐내는 한껏 먹음직스러운 (때로는 어색하리만치 정갈한) 세팅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몇 장을 넘기면 같은 재료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출연하기도 하는 일 또한 빼놓으면 안 되겠지.
그렇게 완성된 요리는 전부 그만의 고유한 이름으로 책에 소개되고, 아는 음식이라 할 지라도 묘하게 독특한 냄새와 식감을 상상하게 했다. 막상 책에 실린 음식은 촬영 과정에서 다 식고 굳었을 텐데. 그런 현실적인 인식보다는 만화 고기나 만화 빵을 볼 때처럼 머릿속으로 맛을 그려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다고 요리책을 일부러 찾아보거나 할 만한 열정은 전혀 아니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던 유학길에 가지고 간 유일한 요리책은 금성출판사의 『도시락 100선』 (한복려 엮음). 집에 있던 책이었고 아마도 엄마가 챙겨 주어서였으려나, 스스로 꾸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껏 살면서 단 한 권의 요리책도 사지 않았다는 것을 글을 쓰며 깨달았다.) 그래도 초보 시절에는 그 한 권의 덕을 많이 보았다. 현재까지도 사랑해 마지않는 혼밥 메뉴인 볶음국수*는 『도시락 100선』의 햄인지 베이컨인지와 양배추가 들어간 단출한 버전에서 출발해 차돌박이, 소시지, 달걀, 피망, 청경채, 배추, 브로콜리 등으로 재료의 확장을 꾀하며 나와 함께 발전해 왔다.
* 언젠가 다양한 버전의 볶음국수를 비롯, 나의 면 사랑에 관해서는 따로 쓰고 싶다.
나중에는 자연스레 요리법 탐독의 장을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한때 수시로 들락날락한 사이트는 ‘나물닷컴’. 요즘은 무얼 검색했다 하면 백종원 혹은 수미네 반찬 레시피가 대세를 이뤄 하릴없이 보게 되지만, 당시에는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대신 ‘나물이네’ 게시판 하나만 요리책 보듯 늘 보며 지냈다. 다정하고 쉽게 설명하는 그의 요리법이 좋았다. 세심하고 포근하게 찍은 조리과정과 완성 사진도 좋았다. 흔한 메뉴든 새로운 요리든 나물이가 만들면 나도 따라 해 보고 싶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학과 사회초년생 시절 꽤 많은 나의 밥상이 나물님에게 빚을 졌는데, 몇 해 전 그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마음 한편이 많이 쓸쓸했다. 고맙다는 댓글 한 번 단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바야흐로 요리 동영상의 시대. 소셜미디어의 타임라인을 훑다 요리 동영상 하나가 자동 재생되면 지나치지 못하고 또 개미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말끔하고 넓은 조리대에서 조명을 잔뜩 받은 식재료가 신속하고 산뜻하게, 너무 쉬워 보이게 조리되는 과정을 넋 놓고 본다. 저 옆으로 튄 밀가루 누가 치워. 한참 고기 주무르던 손으로 오븐 손잡이 그냥 잡는 건가. 그런 현실 인식보다는, 스크린에 펼쳐지는 호화스럽고 역동적인 움직임에 일단 눈을 맡긴다.
나아가 주방에서 요리만 하는 영상으로는 이제 성이 안 차서, 중국 쓰촨 성 산골에 살며 일상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기예를 보여주는 李子柒 Liziqi (리즈치)의 채널에 빠진 지도 수년째다. 리즈치 씨는 음식만 하는 게 아니라 나무 베어다가 가구 만들고, 진흙 퍼다가 화덕도 만들고, 양털 깎아다가 케이프를 짜는 등 범인의 영역을 넘어서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의 채널에 올라오는 다름 아닌 ‘음식’ 영상이 단연 나의 혼을 쏙 빼놓는다. 마파두부 영상만 해도 그래. 밭에서 콩줄기를 베어다가 한 꼬투리씩 까고, 깐 콩을 맷돌에 갈아, 간 콩물을 가마솥에 끓이고 면포에 걸러, 간수 넣어 굳혀 틀에다 누르고, 영상의 후반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두부 형상이 나오는…. 그런 걸 보고 있으면 다 만들어진 두부 사다 썰어서 팬에 볶는 정도는 정말이지 시시해서 재미가 하나도 없어져 버린다.
아마 나는 요리에서, 재료가 변모하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과 내 손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좋아하는가 보다. 때가 되면 반드시 비어 버리는 위를 다시 채워야 하는 의무감이 비록 자주 몸을 무겁게 하지만, 그럼에도 어디서 그럴듯해 보이는 음식 사진을 보거나 절묘한 형型과 색色과 미味의 조합을 맛보기라도 하는 날이면 언젠가는 그걸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인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세상에는 이미 좋은 음악이 많지만, 굳이 내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도 비슷한 심정일까. 물론 단번에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어서 원하는 결과가 아니어도 겸허히 먹어치우겠다는 자세가 꾸준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다 궁극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레시피를 거쳐 내 입맛에 맞는 나만의 시그내쳐가 드디어 내 손에서 탄생하였다는 기쁨을 맞는 것이다.
정성으로 만들어 누군가 맛있게 먹는 모습만 보면 행복하다든지, 먹는 인원이 늘면 요리에 품이 더 드는데도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된다”라고 호방하게 말하는 이들의 넉넉한 마음씨를, 앞으로 나도 가지게 되는 날이 올까. 그건 아무래도 알 수 없지만 오늘의 나는 나의 이유로나마 요리를 멈추지 않는다. 이제 요리책을 들추지 않고도 차릴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가 이만큼 늘었고, 긴장 않고 해내는 분량이 어느새 1인분에서 2인분으로 늘어 있다는 이만큼의 사실만 조용히 축하하면서.
Seine
- 나물님, 고마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