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마특선 3] 아무 날도 아닌 날

호텔 마카다미아 특선 3 - OO 플레이트

by 세상 사람


호텔 마카다미아 인스타그램 계정('심플하지만 화려한' 편 참조)에 집밥 사진을 올릴 때 나도 모르게 #홈파티 해시태그를 붙이는 음식이 있다. 이름하여 ‘OO 플레이트’. 빈칸 OO 자리에는 ‘치즈’와 같은 주재료나 ‘크리스마스’ 같은 식사의 목적이 때에 맞춰 들어간다. 파티란 친목을 도모하거나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잔치나 모임을 뜻하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참석인원은 N과 나 둘 뿐이지만, 같이 밥을 먹으며 우리의 친목을 도모한 일이 반대의 경우(=싸운 적*)보다야 많다. 다만 축하하거나 기념할 이유가 있는 날은 몇 번 되지 않고 나머지는 대부분 ‘그냥 저녁밥’이다.

* 같이 살기 시작한 2016년에서 약 2년간은 싸운 날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건 생략하자.








업로드 기록에 따르면 우리 집 식탁에 ‘OO 플레이트’라는 명칭의 음식이 처음 오른 날은 2018년 4월이다. 빈칸 OO는 ‘와인’. 역시 #homeparty가 붙었다. 그날은 실제 파티이긴 했다. 내가 새로 일을 하나 하게 된 것을 축하하자며 차린 저녁식사로, 곧 돈을 벌 예정이라 그랬는지 재료가 열한 가지나 깔렸다(언제 또 여윳돈이 생길지 모르는 프리랜서의 삶). 스테이크, 프로슈토, 초리조, 구운 햄과 양파, 브리치즈, 생 모차렐라와 토마토를 번갈아 담은 카프레제, 스낵 오이와 새싹 샐러드, 바삭한 마늘빵까지. N과 둘이 먹기에는 많았던 것 같다.

집에서 와인 플레이트를 직접 차린 게 처음이었던 나는 (모양을 잡느라) 시간을 길게 썼다. 이런 종류의 음식은 구성composition이 생명이라 아무렇게나 차릴 수 없다. 하지만 또 너무 인위적인 구획이 생겨도 어색하기 때문에 손 가는 대로인 척하며 머릿속으로는 전체의 조화를 헤아려야 한다. 영화 <수면의 과학>에서 셀로판 바다를 만들던 스테판에게 스테파니가 건네는 말, “자연스러움을 얻기란 힘들어. 잠깐 한눈을 팔면 금세 질서가 끼어들지.” 딱 그런 기분이다.








이후의 플레이트는 구성품의 가짓수와 조리과정을 점점 줄였고, 재료보다는 그날의 목적을 이름에 붙였다. (사실 재료야 뭐든 접시에 펼쳐 담으면 ‘플레이트’긴 하다.) 첫 문단에 적은 대로라면 ‘그냥 저녁밥’이 대부분인데 무슨 목적이냐고? 보통의 끼니나 야식인 것은 맞지만, 그 음식을 먹으며 무얼 시청하느냐에 따라 제목을 지어 본다는 얘기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따 쇼미 더 머니 볼 때 뭐 먹을까?”
‘쇼미 플레이트’다.


동백 플레이트, 낭만닥터 플레이트(자매품: 돌담 미니버거), 백단장 플레이트, 설국 플레이트…. 가장 좋아하는 미드인 <베터 콜 사울> 관련 기록이 없는 걸 보니 이건 음식에 이름 붙일 겨를도 없이 온 신경을 쏟아가며 봤나 보다. 다음 시즌을 기약한다.








OO 플레이트의 좋은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손쉽다. 나의 최초 플레이트처럼 힘을 잔뜩 준 버전은 결코 간편하지 않지만, 평소 먹는, 빵과 치즈를 중심으로 한 플레이트는 사 와서 차리기만 하면 된다. 비록 채소나 과일을 씻기 위해 손에 물은 묻혀야 하나 (익혀야 하는 재료가 없다면) 불 앞에는 안 가도 된다. 따로 간을 맞출 필요도 없고, 뜨겁거나 맵거나 흐르지 않아서 눈을 스크린에 두고 집어 먹기도 편하다.

둘째, 맛있다. 맛있는 기성품—빵, 치즈, 햄 등—을 사는데 맛있을 수밖에. 여러 가지 사 보고 취향에 맞는 제품을 기억해 놓으면 된다. 견과류나 과일은 있는 그대로 맛이 있고, 때에 따라 색다른 재료(예: 참나물, 꿀호떡)를 가미하는 재미도 있다. 게다가 펼쳐져 있는 아이템 중에서 원하는 조합을 골라 조립하면 되니 각자 입맛에 맞추어 먹을 수 있다.

셋째, 기분이 난다. 무슨 기분? 파티 기분.

아무 날도 아닌 날에도.








요사이 긴축 재정이라 아주 기본적인 플레이트를 주로 먹고 있는데(‘긴축 플레이트’라고 부를까?), 다시 안정이 되면 초창기를 추억하며 상다리 휘어지게 한번 차려 먹어야겠다. 안 먹어 본 빵과 치즈에 메이플 시럽도 사야지. 훈제 연어와 올리브도 곁들이면 좋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은 어쩌다가 빛나고 아주 가끔 황홀하지만, 대부분은 아무 일 없고 무슨 일이 없으면 더 다행인 길고 따분한 시간을 견디는 과정일 테다. 그러니까 그런 날 중 아무 날을 골라서 파티를 좀 해도 괜찮겠지. 태어난 날, 만난 날, 졸업이나 승진처럼 특별한 이유라서가 아니라 가끔은 그냥 존재함을 기념해도 되겠지.




“Randomness is very difficult to achieve. Organization always merges back if you don’t pay attention.” - <The Science of Sleep>



Se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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