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보카도 덮밥
“얘 사랑니 뺐을 때 내가 전복죽 사다 줬는데, 양쪽 네 개를 다 빼서 못 씹잖아. 그래서 전복죽을 믹서기에 갈아먹었대 ㅋㅋㅋ”
작년에 미국 사는 언니가 잠깐 한국에 나왔다. 내가 귀국한 해에 샌호세에서 결혼해 이제는 아이 셋의 엄마가 된 언니가, 첫째와 둘째는 형부에게 맡기고 네 살배기 막내만 데리고 오랜만에 인천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모처럼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언니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 나는 언니가 사다 준 전복죽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근처에 전복죽을 파는 한국 식당이 있었나, 그런 것도 잘 기억이 안 난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언니와 함께 살던 집은 스튜디오(한국에서는 원룸이라 부르는 구조의) 아파트였는데, 맞다. 그때 어쩌다가 하루에 양쪽 사랑니 네 개를 다 뽑고 와서 침대에 2박 3일을 몸져누웠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보통은 한쪽씩 나눠 뽑는데 그 의사 돌팔이 아니냐, 한꺼번에 뽑으면 위험한 거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흑, 모르겠다. 다행히 며칠 고생한 끝에 체중만 좀 줄고 멀쩡하게 살아 남았다.
언니와 나는 자매 중에서도 사이가 좋은 축이었다. 다른 자매(남매 혹은 형제)의 삶을 살아 볼 수 없으니 확신은 못 하지만, 미국에 같이 사는 동안 서로 적잖이 의지하고 산 것만은 확실하다.
많은 언니들이 그렇듯 언니는 나를 잘 부려먹었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류의 일화인데, 거실 소파에 앉아 방에 있는 나를 불러내 자기 코앞에 있는 휴지를 달라고 한다든지, 같이 듣는 교양수업 숙제를 나에게 (무상으로) 아웃 소싱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렇게만 쓰면 일방적인 착취 같지만 나도 언니 덕을 꽤 봤다. 내향적인 내가 사람 사귀는 일에 딱히 노력하지 않을 때*에도, 밝고 인기 많은 언니 덕에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외로움 모르고 지냈으니까.
* 노력만 안 한 게 아니라 마구 벽을 치고 밀어내던, 제일 잘하는 일이 ‘방문 닫고 들어가기’였던 시절.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같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긴요했다. 언니와 나의 운전 인생에는 각각 1인 1폐차 경력이 있는데, 첫 테이프는 언니가 끊었다. 아파트 진입로로 서행해 들어오던 언니를 보험도 들지 않은 상대가 뒤에서 받고 도주했는데, 수리비가 우리 차(같이 타던 중고차) 가격을 넘어 버린 것. 그러면 그 돈을 들여 차를 고칠 경제적 가치가 없으니 “Totaled”, 이른바 폐차다. 당시 우리가 들었던 보험은 Liability로 내 쪽 과실일 때만 상대에게 보상해 줄 수 있는 타입이어서, 결국 우리는 어디에서도 보상금 한 푼 받을 수가 없었다.
언니는 그 사고로 한 동안 운전을 하지 못했고, 나는 자연스레 언니의 운전기사 겸 보험 처리 담당이 되었다. 미국에 간 지 얼마 안 돼 영어가 서툴렀는데, 그때 보험회사 직원과 통화하면서 내 회화실력 중 50% 이상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폐차도 상대 과실이었다. 생돈 들여 구입한 두 번째 중고차는 주로 내가 몰았다. 학교 다녀오는 길이었나? 고속도로 출구로 곧 나가려고 4차선을 타고 있었는데, 내 왼쪽을 달리던 밴이 나를 못 보고 돌연 앞으로 끼어드는 바람에 그걸 피하려다 아주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핸들을 급히 꺾은 나는 차 오른쪽 전면으로 가드레일을 시원하게 쓸고는 당황한 나머지 다시 왼쪽으로 확 돌아, 달려오는 차들 사이를 수직으로 가르며 1차선까지 횡단해 중앙분리대에 뽀뽀하고 나서야 차를 멈췄다. 뒤에서 내 행적을 목격한 몇몇 운전자들이 차를 세우고 달려와 나의 안위를 묻고 경찰을 불러 주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아연실색하기는 처음이었다. 젖힌 운전석에 한참 멍하니 앉아 있다가 언니에게 전화했고, 곧바로 언니가 달려왔다. ‘나도 이제 운전 못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와 달리 언니를 보자마자 마음이 놓여서, 수습을 마치고 바로 너덜거리는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1차 폐차에서 얻은 교훈대로 이후 모든 보험은 Full coverage로 들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수리비가 차 값에 가까워 Totaled, 받은 보험료로 또 다른 차를 사야 했고, 그렇게 두 번째 차와도 이별이었다. 사고 당일 바로 운전대를 잡아 괜찮은 줄 알았건만, 그날 밤 소파에 누워 쉬려는데 울컥 눈물이 났다. 옆을 지나다가 그러는 나를 본 언니는, “으이그,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당연히 놀라지” 하며 담요를 덮어 줬다. 아무리 밖에서 센 척을 해도, 보통은 언니 눈을 못 속였다.
나름의 산전수전을 같이 겪으며 언니와 사는 동안 함께 먹은 끼니의 기억은 몇 개 콕 집어내기 어려울 만큼 많다. 어학연수 시절, 같이 스파르타로 배워 차려 내던 저녁식사('이거 사다가 조려 먹을까' 편 참조), 첫맛은 충격이었으나 이후 우리의 원 앤 온리 해장 메뉴가 된 베트남 쌀국수, 생일이나 특별한 날이면 꼭 찾아가 기다란 메뉴표에 몽당연필로 한 오더 한 오더 정성스레 마킹해 주문하던 스시, 이 밖에도 일일이 말할 필요 없는 수많은 집밥, 안주, 야식…….
그런데 언니 하면 딱 떠오르는 음식은 위의 나열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닌, 바로 아보카도 덮밥이다. 하나의 메뉴로 명명하기에는 좀 어색할 만치 비공식적인 감이 있으나 여기서는 그렇게 칭하겠다. 작은 그릇에 밥을 담고, 썰은 아보카도 몇 조각을 얹어, 소금 뿌려 떠먹는 게 끝. 언니가 “소금만 뿌려도 맛있어”라고 강조해서 그런가? 다른 양념도 넣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한 입 분량을 떠 올리면 잘 익은 아보카도 과육이 밥알 사이에 조금씩 뭉개지면서, 입 안에 넣으면 망고처럼 씹히기 시작하다가, 버터도 아닌 것이 사르르 녹아들며 밥과 묘하게 어우러지는 맛을 내는 그 음식.
막상 당시에 나는 아보카도를 잘 안 먹다가 몇 년 전부터 가끔씩 사 먹고 있다. 몇 개의 아보카도를 먹는 동안 한 번은 꼭 아보카도만 올린 덮밥을 해 먹는데, 그때면 어김없이 언니를 생각한다. 나는 밥에 간장을 약간 끼얹고, 아보카도에 소금, 후추, 참기름, 깨소금까지 뿌려 덮밥 풀 세트로 진화시켰다.
언니가 그걸 먹는 모습을 자주 본 것도 아니고, 본격적으로 차려 먹기 귀찮을 때 간소히 때우는 용으로 먹었을 뿐인 것 같은데, 이상하다. 따끈한 흰 밥에 연둣빛 아보카도 조각을 올리고 있자면, 자기 책상에 앉아 아보카도 올린 밥 한 공기에 소금 뿌려 야금야금 먹으며 무한도전을 보던 언니, 침대 맡에 라따뚜이를 틀어 놓고 잠들던 언니, 쌀쌀맞고 혼자 놀기 좋아하는 나에게 끊임없이 장난 걸던 언니, 느닷없이 별 보러 가자고 귀찮게 하던 언니, 걸핏하면 나를 부려먹긴 했지만 내 공연이나 졸업식 등 중요한 날에는 꼭 와 주던 언니, 구남친이 입대 때문에 귀국하는 날 공항에서 쿨하게 인사하고는 돌아오는 차 안 참았던 눈물로 범벅이 되어 버린 내 옆에서 운전하던 언니, 몇 달째 임금 체불하고 연락 두절인 고용주 집에 쫓아가 항의하고 격앙되어 돌아선 내게 잘했다고 말해 주던 언니가 차례로 연결되어 그려지는 것이다.
언니는 알까? 내가 이걸 먹을 때 그런 생각이 난다는 걸.
어금니 크랙 때문에 치과에 다녀왔다. 크라운만 씌우면 될 줄 알았더니, 첫 번째 치료 후에도 욱신거림이 나아지지 않아 신경치료까지 받아야 한단다. 오늘은 신경치료 첫날로, 마취가 풀리면 좀 아플 거라는 설명과 함께 받아 온 약봉투를 눈앞에 준비시켜 놓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계속 얼얼하네, 사랑니 뽑았을 때도 이렇게 땡땡 부었는데, 심지어 그땐 양쪽 위아래가 다 이랬다니 언빌리버블, 하며 볼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치통은 아직이지만 순간 어떠한 그리움에 코끝이 아릿하다.
믹서에 전복죽 갈던 일은 까마득해도, 언니가 늘 치던 장난 하나는 떠오른다. 뭔가에 몰두한 내 한쪽 볼 가까이 안 보이게 손가락을 갖다 대고는 “쎄인양(나는 주로 이렇게 불렸다)” 하고 불러서 굳이 돌아보게 만들어 볼을 찌르는 속임수인데, 영락없이 속는 나를 보며 언니는 매번 기뻐했고 나는 매번 짜증을 내며 또 당했다.
지금 안 그래도 얼얼한 볼을 갑자기 찔리고 싶단 말은 아니다. 단지 언니와 내가 마지막으로 같이 살던 스튜디오 아파트에 난무하던 상호적 거리낌 없음이, 고개만 돌려도 손가락에 닿던 그 가까움이 문득문득 그립다는 이야기.
Se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