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추리알 장조림
저녁 7시가 되면 ‘짠’ 하고 식탁이 차려져 있어야 했다. 어쩌다 5분이라도 넘기는 날이면, 일 마치고 돌아오신 호랑이 삼촌의 꾸지람을 각오해야 했으니까. 삼촌이라 부르지만 실은 오촌인 친척 댁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한 이십 대 어학 연수생들의 저녁 풍경이다. 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가 세탁소를 하시던 삼촌께서 우리에게 머물 방과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 주셨고, 스물여섯인 사촌오빠, 스물둘인 언니, 스물하나인 나는 세탁소 일과 가사를 돕는 임무로 신세에 응했다.
스물한 살, 그렇게 나의 밥하기가 시작됐다. 미국에 가기 전까지는 부모님과 떨어져 산 적도, 요리에 이렇다 할 관심도 없는 흔한 십 대였다. 단계로 따지면 기초를 다질 기회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된 느낌이랄까. 재료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혼나고, 맛없으면 혼나고, 늦게 차리면 혼나 가면서 그렇게 스파르타식으로 요리를 배웠다.
삼촌 댁에서 만들어 본 음식 중 기억에 남는 메뉴가 몇 가지 있어 소개한다.
첫 번째는 오징어 볶음.
엄마가 해 주시던 오징어 볶음을 좋아했다.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을 베이스로 한 양념에 파, 마늘, 양파, 당근, 고추 등을 넣어 볶고, 몇 숟갈 넉넉하게 떠서 밥에 올려 비벼 먹으면 그만인 일품요리. 그 기억으로 오징어를 볶은 날, 삼촌께서 말씀하셨다. 채소가 숨이 다 죽었다, 재료가 살아 있어야지, 라고. 처음 치고는 엄마표 오징어 볶음과 비슷하게 잘 됐다고 생각했던 터라 내심 실망이 컸는데 얼마 후 한국식당에서 파는 볶음 메뉴를 먹어 보고는 조금 이해가 갔다. 채소가 살아있다 못해 양념은 스칠 뿐인 프레쉬한 맛. 아, 문화 차이인가, 하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두 번째는 곰국.
엄마는 큰 솥에 종일 사골을 우리고, 고기는 따로 떼어 먹기 좋게 찢어 놓으셨다. 송송 썬 파와 찢은 고기를 각각 통에 담아 두면, 고기 한 줌, 파 한 줌을 밥 위에 얹고 뜨거운 사골 국물을 부어 각자 소금으로 간을 해서 먹으면 되었다. 그 기억으로 사골 곰국을 끓인 날, 삼촌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재료를 다 망쳐 놨구나, 라고. 이날은 조금 울컥한 것도 같다. 곰국이 일이십 분 끓여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언니 오빠와 내 입에는 먹을 만했는데 말이다. 이후 다시 생각해 보니, 삼촌은 알맞게 간이 된 국물과 고기 붙은 뼈, 고명이 한 그릇에 담긴 갈비탕 스타일만 드셔 보신 건가 싶기도 했다. 아, 미리 말씀이라도 해 주시지.
세 번째는 메추리알 장조림.
그렇게 가슴팍에 대못이 박혀 가던 어느 날. 언니 오빠와 중국 마켓에서 장을 보며 “이거 사다가 조려 먹을까?” 하며 메추리알을 사 왔다. 한입 크기에 달콤 짭짤해 도시락 반찬으로 안성맞춤인 추억의 맛. (쇠고기, 꽈리고추 등 재료를 추가해도 되지만) 간장, 설탕 베이스의 기본양념에 삶은 메추리알을 넣어 조리기만 해도 어느 정도 맛이 나오니 실패 확률도 낮은 메뉴. 삼촌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걱정은 됐지만 그 맛이 그리워 감행한 날, 삼촌께서 말씀하셨다.
“맛있다.”
응?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그간의 설움(?)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런 영광을 메추리알 장조림이 가져다줄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해서, 언니 오빠와 나는 그날 이후로도 몇 번씩 그 얘길 했다. 삼촌의 웃는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다가도, 메추리알 장조림을 떠올리면 금방 눈앞에 그려진다. 이런 건 처음 먹어 본다고, 이렇게 하니 맛있다며 지으시던 웃음이.
삼촌 댁에 살았던 짧은 기간, 과정은 즐기지 못했지만 한 끼 한 끼 차려내기뿐 아니라 장보기, 식자재 관리, 식단 짜기 등 다양한 스킬을 속성으로 익힌 덕에 이후 본격적인 유학 생활을 하면서도 끼니만큼은 곧잘 챙기게 된 것 같다. 유학에서 직장생활까지 근 10년이, 한국에 돌아온 후로도 어느덧 강산이 변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귀국 후 부모님과 같이 산 기간을 빼면 다시 나의 주방을 갖고 밥을 한 지 올해로 4년이니, 내 요리 경력도 어느덧 14년.
이달부터 밥해 먹는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뭔가 쓰고 싶다는 순수한 욕구에서 출발해 3개월간의 고민 끝에 정한 주제다. 음악 이야기를 쓸까, 우울증 극복기를 쓸까, 그것도 아니면 연애 썰이라도 풀까. 글로 쓸 수 있을 만큼 좋아하거나 잘 알거나 꾸준히 해 온 게 무엇일지 이리저리 구상하다 문득 깨달았다. ‘평생 먹어 온 밥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았구나.’라고. 온 가족이 함께 밥을 먹던 어린 시절부터 손수 밥을 차리는 지금에 이르는 기억이 한꺼번에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나왔다. 요리법이나 메뉴 자체보다는 각 음식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기록할 요량인데, 글이 모일수록 오늘은 뭘 해 먹나 하는 고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또한 몰래 품어 본다.
누군가의 입맛에 맞춰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맛있는 글, 재료가 살아 있고 간이 적당한 글이면 좋겠다. 일곱 시 정각에 맞출 필요도, 늦었다고 혼쭐낼 사람도 없으니 하나씩 천천히 차려 봐야지. 나의 냉장고에는 오징어, 사골, 메추리알 말고도 더 많은 얘깃거리가 올망졸망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Se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