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의 경계에서, 나의 지리산 종주기
〈꽃〉,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시집 한 권과 함께 지리산을 다녀왔다. 내 삶도 경계에 흐르고 있다.
무사히 정상고도(?)로 내려와 아스팔트 길을 밟는데, 호밀밭출판사 대표님의 연락을 받았다. 부산일보의 당일자 한 지면을 요시다 쇼인이 가득 채웠다고 한다.(사실 올해 초부터 내 시선은 요시다 쇼인이 아닌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로 넘어가 있었다. 얼마 전 출판한 책은 쇼인과 작별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역시나 쇼인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고, 여기저기서 알아보는 것 같아 다행이다. 책을 집필하면서 대한민국의 역사학에 대해 큰 회의감을 여러 번 느꼈다. ‘도대체 왜, 어느 누구도,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뿌리”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 걸까??’
기득권유지, ‘사관’으로 대변되는 관점의 틀 안에서 멤돌고 있어 시야가 한정되어 있다. 학문적인 겸허함을 바탕으로 한 탐구활동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어제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역사는 바로 그 거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만 지금의 그것은 너무나 탁한 거울이다. 메이지유신 150년이 지난 지금에라도, 한반도에 쇼인이 정확히 알려지기 시작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일본은 본인들보다 더 많이 알고, 더 강한 상대에게 고개 숙이는 경향이 짙다. 두터운 실력으로 일본마저 감화시켜버리는 한국을 꿈꾼다. 다시는 역사의 손님이 되어, 이 땅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
불언지교 : 말 없는 가운데의 가르침
산은 말하지 않고 많은 것을 가르친다. 세상에는 수많은 말과 가르침이 난무한다. 어쩌면 이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가르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배우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은 아닐까? 형제봉의 묵직한 바위도, 하산길에 본 키 큰 나무들도, 등산스틱이 되어준 작은 나무도 말이 없었다.
20대부터 이제까지 다녀본 산(고지)을 떠올려보니, 은근히 많이 다녔다! 두서없이 나열해보면,
한라산, 설악산, 치악산,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불암산, 앵봉산, 울릉도 성인봉, 독도 정상, 강화도 마니산, 강원도 양구의 백두op, 경기도 연천 최전방의 고왕산, 강원도 고성의 최전방 고지들을 비롯해 강원도, 경기도, 전라도, 충청도의 이름 모를 고지들과 일본의 최고봉인 후지산까지...
많은 산(고지)에 발자국을 남기고 왔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행군/고지정복 경험을 아낌없이 선사해준 대한 육군에 진심 감사드린다ㅎㅎ)
지리산을 걸으며 이제 백두산, 개마고원, 금강산과 개성의 송악산에도 꼭 가보고 싶어졌다. 2018년에 펼쳐지는 국제관계가 서슬 퍼런 칼 날 위에서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는 형상이지만, 자유롭게 지리산을 걷는 것처럼 북쪽 동네도 거닐 수 있는 날을 진심으로 바라본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는 일은 남이 아닌, 바로 “나”의 문제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지금까지의 무지와 분열, 대립과 갈등을 넘어 역사의 손님이 아닌 주인이 되라는 시대적 의무와 사명 그리고 천명을 감당해야 하는 건 아닐까?
산은 애써 편 가르지 않고, 이래저래 구분지어 배척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품는다. 자연의 법칙은 매우 단순하다.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도 의외로 단순할 수 있다. 우리네 삶도, 나도 그렇다. 그렇지만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참 많다. 결국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일 뿐이다.
- 6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