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의 경계에서, 나의 지리산 종주기
걸음을 재촉하다가 화개재(1,315m)에 도착해 잠시 땀을 닦았다. 화개재는 경남에서 올라온 소금과 해산물과 전북에서 올라온 삼베와 산나물 등을 물물교환하던 지리산 위의 장터였다고 한다. (이 높은 곳에 시장이... 선조들의 체력이 정말 대단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손목부근에 뭔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보니 자그마한 자벌레가 꿈틀대고 있었다! 자벌레는 말 그대로 자로 재는 것처럼 움직이는 자나방의 유충이다. 움직이는 모습이 워낙 독특하고 신기해서 어린 시절에도 데리고 놀던(?) 추억이 있다. ‘어디서 붙어온 걸까?’ 소매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에게 미소를 건네고 주변의 풀밭에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마침 노래 한곡이 떠올라 흥얼거리며 다음 걸음을 내딛었다. 꿈틀 꿈틀, 자벌레의 꿈 틀도 일일신 우일신 이길!
Thema #1 《나방의 꿈》 이승기
항상 날 이상하게 쳐다봐 모두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도 말이야
항상 날 다들 피해 언제나 왜 그럴까. 나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말이야
전부터 그랬어 내겐 원래 그랬어. 한마디 해보지도 못하고서 나 혼자 울어
나도 날고 싶어 나도 살고 싶어. 세상은 나에게 왜 하필 나에게 이런걸까.
돌이킬 수 없나 나비로 살고 싶어 다시 태어나고 싶어.
나 가로등 뒤에 숨어 살기는 싫어.
나비로 살고 싶어 꽃밭에 가고 싶어. 이상하게 생겼지만 내 맘은 하얀 나비란다.
삼도봉은 말 그대로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를 나누는 봉우리다. 삼도봉에 도착했을 때 다른 등산객이 한 명도 없어서, 홀로 조용하게 삼도봉의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지역감정, 정치색깔, 경제발전 정도가 이 점을 기준으로 나뉘어져 있으니, 차라리 없애버리면 어떨까? 라는 도발적인 생각과 함께!ㅎㅎ
지리산 일대에서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10월부터 휴전 3년 뒤인 1956년 12월까지 공비토벌작전이 펼쳐졌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을 시작한 국군/유엔군의 공세에 미처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은 산악지역으로 숨어들었고 게릴라조직을 구성해 후방에서 한국군을 괴롭혔다. 태백산맥을 따라 이동하던 소위 ‘빨치산’은 휴전 이후에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갔고, 1953년 12월 지리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진행됐다. 지리산의 깊은 계곡인 피아골과 뱀사골은 당시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곳이다.
조정래 선생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빨치산과 국군, 농민과 지주, 소외계층과 권력계층, 자유민주주의자와 공산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와 반민족기회주의자,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 학생과 선생 등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곳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상은 사람을 앞설 수 없다. 한반도는 4차 산업혁명을 논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근대적 이념분쟁의 표본으로 남아있다.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다. 역사의 격동 속에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모두는 결국 피해자이며 또 피의자였다. 이념과 사상과 가치관이 어떻든 간에 한반도에 사는 이들이 스스로 분열하고 자멸하며 피 흘리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피아골과 뱀사골은 속삭이고 있었다.
미투 운동의 피의자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시인 고은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라는 짧은 시를 남겼었다. 이번 지리산 여정은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올라갈 때도 보았다. 내려올 때도 볼 그 꽃들.
많은 이들이 높은 곳에 오르기를 꿈꾸지만 정작 내려감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실제로 등산을 하다보면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거칠고 위험하고 고되다. 눈앞의 언덕을 넘으면 또 다른 언덕이 있는 우리네 삶에서 내려옴 역시 올라감만큼이나 소중하고 아름답다. 내려올 줄 모르는 이들이 삶과 사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내는 걸 매일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겸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정녕 힘든 일인 것 같다.
- 4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