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암 진단, 죽음, 삶
특히나 애인과 투닥거리던 날이었다. 하루 종일 날이 선 상태로 서로를 대하다 지쳐서 애인의 무릎에 머리를 뉘이고 지금 격리를 하고 있지 않다면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주절주절 말하고 있는데, 애인이 무릎 위에 놓인 내 머리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4mm 정도 되는 검은 반점이었다. 그 모양이 심상치 않았는지 머리칼 속을 한참 뒤적거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심각해졌다. 내 두피에는 검은 반점이 7개나 있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머리에 그렇게 반점이 생기는 경우는 검버섯인 경우나 피부암인 경우, 혹은 흉터인 경우가 있었다. 나는 젊은 편이고 머리카락이 길어서 두피가 햇빛에 노출되는 일이 잦지 않으니 검버섯은 아닐 것이다. 흉터 모양은 아니어서 남은 가능성은 피부암 밖에 없었다.
피부암은 동양인에게는 잦지 않은 암이며, 한국인은 대개 손이나 발에 생기는 반점으로 시작하는데, 혹시 두피에 피부암이 생긴다면 치사율이 두배에 달한다. 아마도 발견하기 쉽지가 않고 뇌에 가까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우리는 너무 걱정이 됐지만 다음날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기로 하고 오늘은 걱정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했다. 그렇게 약속하고 평소처럼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는데 티비에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걱정하지 않기로 했지만 자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파란색은 내 생각의 흐름) 내가 젊은 날에 암일 수도 있다니. 반점이 벌써 7개가 있으니 전이가 됐다는 말일까? 암이라면 얼마나 진행됐을까? 제거한다고 해도 두피에 구멍이 여러 개 남겠네. 누가 봐도 암환자처럼 보이겠지? 애인이 내 머리칼을 갈색으로 염색해 달라고 노래를 불렀었는데 이젠 그러지도 못하겠네. 항암치료를 한다면 머리카락이 다 빠지겠지? 그럼 가발을 쓰고 다녀야겠네. 불편하고 답답할 텐데. 암에 걸렸을 수도 있는데 머리칼로 인해서 외모가 바뀔 걱정을 먼저 하다니 나도 참 한심하다. 벌써 암에 걸린다면 살아남는다고 해도 앞으로 생명보험 같은 건 들지도 못하겠군.
부모님한텐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지? 먼저 조용히 미국에서 치료해 보고 죽을 수도 있다면 그때 말씀드려야 하나? 친구들한텐 그냥 말하면 되겠지. 내가 암에 걸렸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도 있을까?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지만 삶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하는 걱정중에 90% 이상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했다. 이건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어.
만약에 죽는다면? 나는 죽기 전에 후회할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항상 60세까지만 산다는 마음으로 인생을 압축해서 살려고 하고 있다. (<삶의 끝에서 아쉽지 않기 위해서 세운 계획> https://brunch.co.kr/@sejooni/7) 그런데 60세가 아니라 30세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거의 안해봤다. 내가 젊은 날에 요절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니. 자주 과식하고 과음하고 좀 몸을 막쓰긴 했지만 나름대로 운동도 하고 나보다도 더 막 쓰는 사람들 보다는 낫다고 자위하며 살아왔었는데 내가 암이라니. 하긴 암은 아무나 생길 수 있으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아는 10~30대에 암이나 질병을 겪고 돌아가신 분들도 계신데 내가 그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구나. 남이 걸릴때는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고 내가 걸리면 '내가 걸리다니' 라고 생각하다니 난 참 간사하구나.
여한이 없도록 살긴 한 것 같다.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운이 좋게 좋은 가족과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천생연분인 애인을 만나서 사랑도 마음껏 하고, 이것저것 자아성찰이나 성취의 기쁨도 누리다 가려고 노력을 했으니 이만하면 잘 살았다 싶긴 하다.
하나 못해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는 항상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못 낳은 것이다. 나와 애인은 사귄 지 거의 5년이 됐지만 결혼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아직 결혼하지 않고 있는데 아이는 올해 가질 계획이었다. (결혼도 4월에 하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미뤄졌다.) 나는 벌써 일이 년 전에 아이를 가지고 싶었지만 애인이 경제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해서 기다렸고 이제야 준비가 됐는데 결국 아이를 못 낳고 갈 수 도 있겠네. 오히려 책임 못 지고 떠나서 애인이 편부모가 될 바에야 이런 쪽이 다행이긴 하다.
만약에 죽는다면 남은 시간 동안 뭘 해야 할까? 지금 뭘 해야 하지? 생각해 보니 나는 애인과 앉아서 티브이 볼 때가 가장 행복하구나. 적어도 내가 지금 티비를 보고 있는 일이 시간낭비는 아니네. 한국에 가서 가족들과 애인과 다 같이 함께 티비를 보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겠다.
티비를 보던 애인이 물었다. "무슨 생각 해?" 내가 "암 생각은 아니고.... 두피 생각"이라고 답하니 애인이 그게 그거지, 안 하기로 했잖아 라며 내 팔을 사정없이 때렸다. 내가 애인에게 물었댜. "사실 너무 걱정돼. 너는 지금 검은 반점에 대한 생각이 몇 프로 정도야?" 애인이 답했다. "50%... 이상?" 애인도 나만큼 걱정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걱정하는 내가 바보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돼서 인 것 같다. 그날 밤은 잠을 설쳐서 중간에 여러 번 깼는데, 깰 때 마다 평소에 똑바로 자는 애인이 비스듬히 내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었다.
다음날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 의사가 보더니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점이라고 했다. 조직검사를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애인은 믿을 수 없어하며 다른 병원에도 가보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지만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 어떻게 얼굴에도 별로 없는 점이 두피에 그렇게 크게 7개나 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의사가 그렇다고 하니 일단은 믿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애인에게 사실 나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니 아이를 못 낳은 것 하나가 아쉬웠다고 고백했다. 애인도 그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내가 암 진단을 받는다면 내 난자를 얼려서 대리모 출산을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 내가 죽으면 나를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려고 했다고 한다. 둘다 눈물이 났다. 서로 약속했다. 이번은 아니었지만 언젠간 우리는 아프게 되거나 죽게 될 테니 우리 어제를 잊지 말고 앞으로 항상 곧 죽어도 아쉽지 않을 인생을 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