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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준희 Nov 18. 2020

남자 고용주였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집 관리 일도 배울 겸, 이번에 세입자가 집을 초토화하고 나가면서 생긴 문제들 중 대부분을 내가 한 명의 60대 업자와 함께 하루에 4-5시간씩 같이 일하면서 해결했다. 직접 페인트 칠을 하고 구멍을 메우고 청소를 하면서 업자와도 좋은 관계를 쌓았다고 생각했다. 일 관련해서 자주 통화/문자를 했는데 가끔 사적인 이야기도 꺼내긴 했지만 나를 친근하게 느껴서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일이 끝나고 나서 어이없는 문자를 받았다. 페인트 칠 할 때 입은 청바지가 더러워졌으니 몸매가 드러나는 바지를 한벌 더 사라는 말이었다. 이 문자를 보고 정말 기분이 나빴다. 첫째로 성희롱이었고, 둘째로 2주 정도 일하고 몇백만 원을 주는 고용주가 남자였어도 이런 무례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젊은 여자라 무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자였다면 아마 단골로 만들기 위해 정중히 대했을 것이다. 


내게 성희롱을 하거나 관심을 비친 고용인은 그가 처음이 아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몇 달 전에도 수리를 맡긴 (전에 다른 집에서 함께 일했던) 배관공이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끈적한 헛소리를 섞으며 내게 수작을 걸었다. 그래 놓고 값을 더 싸게 해 준 것도 아니었으며 일을 더 잘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집에 세입자가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일을 정말 형편없이 해 놓았고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싸게 받아서 분노했었다. 그들의 성적 대상이 되는데서 오는 이득은 전혀 없다. 


그런 사람들이랑 꼭 같이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정말 짜증 나는 건 이런 사람들을 다 잘라버리면 함께 일 할 사람이 없단 사실이다. 나도 물론 이런 사람들하고 일하고 싶지 않지만, 부동산과 인테리어 시공 쪽에는 여성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한두 명이 아니고 50% 이상의 확률로 이런 식이다. 물론 잘 찾아보면 이런 헛소리도 안 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왕복 3~4시간 거리에 살면서 낮에는 회사에 다니는 내가 휴가를 내고 운전해 와서 많은 업자들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다. 한번 일을 시켜보고 일처리가 마음에 든다면 나에게 성희롱을 한다고 해도 일단은 일을 시켜야 하는 게 지금은 내 어쩔 수 없는 입장이다. 더럽고 치사하고 억울하지만 이렇게 고생을 하다 보면 나중에 진짜로 큰 일을 할 때는 단단해져서 형편없는 사람들을 다 걸러낼 수 있을 거라고, 수업료를 지불하는 거라고 여기고 있다. 


언제쯤이나 여성이 남성만큼 존중받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할 때마다 결국은 내가 힘을 가진 입장이 되어서 세상을 바꿀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단순히 고용주 입장이 아니라 큰 프로젝트를 주는 고용주 입장, 그리고 꼭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돼서 이런 현실을 꼭 바꿔놓을 것이다. 예전에 나는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번 생에 내가 만들어 놓을 평등한 세상에 다시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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