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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Jan 08. 2022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거지

신혼

요즘 남편이  자꾸 따라한다. 휴지통에 쓰레기 봉투를 바꿔 넣어 달라고 하면  주먹을  쥐고 ‘이라고 한다든지,  나가기 전에  앞에 서서 입을 삐죽 내밀고 “회사 가기 시러라고 한다든지 내가 장난을  때면 원망스런 눈빛으로 새침하게 쳐다보든지의 행동을 말이다. 덩치가 나의  배는 되는 남편이 나의 따라쟁이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나는 남편이 내 모습을 닮을까 봐 걱정이다. 나는 밖에 나가면 차분한 말투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되도록 철들어 보이게 온화한 척, 성숙한 척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집에서는 아주 말썽에 구제불능이다. 사춘기가 빨리 온 12살 여자애 같다. 남편은 왜 이런 내 모습을 따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꾸 입 내밀고 심통 부리는 꼬마 마녀 같은 모습만 따라하는 남편을 보면서 대체 왜 저러는 건가 싶다가 ‘이게 그 <사랑의 단상>인가?’ 싶어 무릎을 탁 쳤다. 무언가 정의 내릴 수 없는, 동어 반복의 어리석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헤엄칠 수밖에 없는 사랑. 그 사랑의 조각들.


어젯밤에 독서 모임 사람들하고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같이 읽었다. 20대 때 아주 좋아했던 책인데, 다시 읽으니 그때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어려웠다. 책에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동어 반복의 어리석음, 상상계’ 등의 어려운 말들이 떠다녔다.


기억나는 걸 요약해보자면, 바르트는 결국 ‘사랑은 결코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며, 언어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에 어리석은 동어 반복만을 할 뿐’임을 말한다. ‘좋으니까 좋아하지. 미우니까 미운 거야. 눈물이 나서 울어’처럼 어리석음의 잔치인 동어 반복. 사랑은 언어로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저 온 감각으로 보고 느낄 뿐이다.


사랑은 한마디로 정의 내려질 수 없기에 그 이모저모를 세상에서 가장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로 묘사해놓으면, 독자들은 곰곰이 단어의 의미를 더듬다가 사랑의 미묘한 티끌 같은 장면까지 상상하게 되는 것 같다. 남편이 저렇게 바보 같은 12살 사춘기 여학생처럼 행동하는 나를 따라하는 것을 보며 사랑의 이미지를 떠올리듯 말이다.


이런 삶의 작은 조각들이 우주의 드넓은 은하수 같은 사랑의 세계에 촘촘히 쌓이고 있나 보다. 따라쟁이 남편의 우스꽝스런 모습은, 은하수의 0.00000001%의, 혹은 제로에 가까운 무게의 민들레 홀씨가 되어 사랑이란 묵직한 세계를 채우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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