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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Jun 05. 2023

임신기의 행복

임신 14주 차

빠르면 임신 14주 차에도 성별을 알 수 있다던데, 호기심에 다음 진찰 일정보다 일찍 가볼까 얼핏 마음도 들었지만 그것도 마음뿐 집에 누워 있는 게 가장 편안하고 좋다. 집순이 본능이 우세한 임신 생활 중이다.


최근에 아기가 나오는 꿈을 두 번 꿨는데 신기하게도 꿈속 아이들이 모두 남자아이였다. 내가 은연중에 남자아이를 원하나? 아니면 뱃속 아기가 남자 아이려나? 의아한데 어쩐지 건강한 아이가 나타나 주려고 하나보다 하고 말았다. 모두 방실방실 웃는 아기들이었으니 말이다.


임신 12주 차가 지나면서 울렁거리던 입덧, 일명 울렁덧이 많이 잠잠해졌다. 입덧을 할 때면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같은 시기에 임신한 친구에게 전화해서 ‘너도 그러냐, 어떠냐’ 하면서 위안을 얻고는 했는데, 친구도 나도 기적처럼 12주가 지나고 입덧이 많이 좋아졌다. 물론 울렁덧이 잠잠해진다고 입맛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14주 차가 되니까 두통이 생겼다.


입맛이 전처럼 돌지는 않아서 요즘에도 찐 감자, 삶은 계란, 삶은 옥수수 이런 걸 맛있게 먹고 있다. 임신 전에는 감자 삶는 법, 계란 삶는 법 같은 걸 몰랐는데 요즘에는 모든 음식을 삶아 먹을 기세다. 뱃속에 어르신이 계신 것 같다. 최근에는 간이 덜하고 야채가 많은 샤브샤브가 냉면에 이어 입덧 푸드가 되고 있다. 오늘 강원도에서 엄마가 왔다. 임신 응원 방문이라고 했다.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묻길래 고민하다가 또 샤브샤브를 말했다.


오늘은 남편과 내가 난생처음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던 날이기도 하다. 미리 신청해 둔 ‘예비 엄마 아빠의 부부 요가’ 수업 때문이었다. 마침 첫 수업이 엄마를 만나기 전 시간이었다. 수업에는 총 다섯 커플이 있었는데 20주 차, 27주 차, 30주 차, 쌍둥이 임신부 등 모두 배가 엄청 컸다.


나는 배가 아직 조고매서 14주 차 임신부인 사실이 왠지 쑥스러웠다. 유난스럽게 일찍부터 운동을 시작했나, 안정기인 16주 전에 와서 혼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께서는 이 시기에 운동할 엄두를 낸 건 정말 대단하다며 이 정도로 몸을 쓸 수 있는 정도면 이보다 더한 운동을 해도 좋을 거라고 응원해 주셨다.


어쩐지 으쓱해진 어깨를 톡톡 누르고 문화센터 앞에 있는 상점에서 엄마에게 줄 간식거리를 샀다. 그리고 미리 정해둔 샤브샤브 집으로 자리를 옮겨 석 달만에 만난 엄마와 푹 익힌 알배추를 양껏 먹었다. 임신한 내 모습은 상상해 봤지만, 배가 나올 거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다며 처음 보는 톡 튀어나온 배가 낯설다고 엄마에게 입을 삐죽였다. 남편은 배만 조그맣게 나온 날 보면서 귀엽다고 하는데 놀리는 건지 진짜 귀엽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저런 반응들을 보면서 배 나온 내 모습을 나도 조금씩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아침부터 오랜만에 요가도 하고, 엄마도 보고, 맛있는 샤브샤브도 먹고,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가 만들어준 엄마표 도토리묵도 먹었다. 게눈 감추듯 먹어버린 도토리묵 한 그릇에. 아니 배부른 오늘 하루에, 배만큼이나 마음도 가득 찬 기분이다. 임신했다고 강원도에서 달려와 준 엄마나 같이 요가 수업에 가서 나를 꼭 안아주던 남편. 세상에 든든한 내 편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주변에서 임신기가 참 행복했다고 하는 말들을 종종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그 사람들에게도 오늘 같은 이런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늘 배려해 주는 주변과 가끔씩 입에 딱 맞는 음식을 찾았을 때의 기쁨, 그리고 틈날 때마다 애정을 표현하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서 말이다.


오늘로 임신 100일 차, 시간이 참 금방 간다. 앞으로 180일만 있으면 뱃속 아기를 만날 수 있다. 내가 먹은 이 어르신 입맛의 알배추, 찐 감자, 옥수수, 엄마표 도토리묵이 아기의 예쁜 피부와 건강함으로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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