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농부일지(5)
2025.4.15(화)
4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주말 눈보라가 쳤다.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바람도 많이 불었다. 차가운 날씨에 지난주 심어 놓은 모종들이 걱정되었다. 춥겠다, 춥겠어. 견딜 수 있을까.
날이 좋을 거라 생각하고 아빠와 주말에 만나 밭에 가기로 했는데, 비소식이 있어 월요일로 미뤄두었었다.
토요일 오전 아빠에게 전화하니, 아빠 혼자서 밭에 마실 삼아 왔는데 눈보라가 몰아쳐 아무래도 집에 다시 가야겠다고 하셨다. 내려오는 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괜찮다고 하시며 다음에 보자고 하셨다.
얼마나 눈이 내렸으면 길이 미끄러워 내려오는 길에 미끄러졌을까 싶으면서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다.
아빠의 엉덩이는 괜찮을지, 바지가 젖거나 잔뜩 진흙이 묻은 건 아닌지 걱정되었는데, 아빠의 목소리는 '솔'음이다. 괜찮다는 말이다.
월요일에도 줄곧 비가 내려 아빠와의 약속을 수정하고 화요일 오전에 만나기로 했다. 분명히 아빠와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8시 30분에 전화하셔서는 벌써 밭이라며 천천히 오라고 하신다. 아, 아침 일찍 서둘러 준비하지 않았다면 바로 나갈 수 없었을 거다. 전화를 끊고는 바로 가방을 메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작은 밭이긴 하지만 아빠 혼자서 있을 걸 생각하니 조급해진다. 아빠에게는 내가 가는 동안 북한산 둘레길을 걷고 있으라고 말해놓고 급한 마음을 잠재운다.
아빠와의 약속은 늘 그렇다. 10시에 출발하기로 하면 9시에 이미 준비를 다하고서는 왜 애들이 안 오냐고 종종거리신다. 아빠의 병원 진료나 검사를 따라나서는 언니는 아빠와의 약속이 있는 날이면 "11시 진료인데 벌써 병원 도착!", "9시 출발하기로 했는데 8시에 왜 안 오냐고 전화 옴" 등의 메시지를 보낸다. "시간이 충분히 여유 있다", "지금 가면 너무 이르다", "시간 맞춰가지 않으면 거기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 등 아빠를 향해 매번 말을 하지만 소용없다. 평생동안 해야 할 일을 빨리 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서둘러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어야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아빠에게 자식들이 맞출 수밖에.
밭에 도착하니 아빠가 오두막에 앉아 있다. 밭을 둘러보고 아빠 옆에 앉는다.
아빠가 말한다. "애들은 눈을 맞았는데도 잘 있네." "다음엔 와서 작게 나오고 있는 잡초들을 손봐야겠어."
나는 아빠와 먹으려고 가방에 담아 온 안흥찐빵과 커피를 꺼낸다. 아빠와 나는 식어버린 찐빵을 손에 들고는 오물오물거리며 먹는다. 보온이 잘되어 아직 뜨거운 커피를 컵에 따라 후루룩 하며 마신다.
밭을 앞에 두고, 꽃을 옆에 두고, 푸른 새싹을 발밑에 두고, 언제 눈보라가 쳤냐며 파란색을 내보이는 하늘을 위로하고, 나는 아빠와 오두막에 있다.
"아빠, 어제까지 눈, 비가 왔으니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되겠지? 간식도 다 먹었는데 슬슬 내려갈까?"
밭에 있는 아이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빠와 나는 슬슬 내려간다.
밭에서 내려가는 길, 아빠는 소설 <태백산맥>의 소화와 소설 <토지>의 서희 이야기를 꺼낸다. 아빠는 마치 소화와 서희가 실존인물인 것처럼 소화의 인생이 참으로 애달프다고, 서희는 참으로 대장부라고 말한다. 혼잣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아빠는 하동에 가면 소설 토지의 세트장이 있는데, 최참판댁에 있는 쌀독을 보고 싶다고 한다. 나는 아빠에게 올해 <토지>를 다시 읽으려 하는데, 아빠도 다시 읽어보라고, 우리 <토지>를 읽으며 올해에는 하동에 있는 최참판댁에 한번 가보자고 말한다.
여든의 아빠와 밭에서 만나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가 소설 속에 나오는 서희와 소화의 인생역정 이야기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밭이 없었으면 평일 오전에 아빠와 만나 오두막에서 찐빵과 커피를 나눠먹을 수 있었을까. 슬슬 내려오는 길에 소설 속 인물을 얘기할 수 있었을까. 또 하동 여행을 꿈꿀 수 있었을까. 모두 밭 덕분이다. 어쨌든, 올해 나에게는 밭이 있고, 우리 밭 지킴이 아빠가 있다.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