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란 언제인가?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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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그렇게 생각대로,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누구의 어떠한 인생이든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로 잘 수렴되지 않는다.

나는 살아오면서 참 많은 기쁨과 슬픔, 혹은 그 둘 근처의 감정들을 느끼고 살아왔다.

나는 지금 몇 살인가? 그래서 나는 중년(中年)인가? 아니면 중년(重年)인가?


아무래도 나는 아직 중년(重年)이고 싶은 중년(中年)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중년(中年)이 아닐런가?

척도에 있어 숫자로, 성별로, 절기로 나누면 중년(中年)이 중년이지만, 태어났으면 우리는 그저 도상위의 주사위, 중년이 아니겠는가? '세월의 중년'이 아니고 '세상의 중년'이 아닐런가?


나는 믿는다.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의 새벽들이, 돌아오지 않는 절망의 메아리들이, 희미한 빛 한 줄기 없는 캄캄한 아픔 속괴로움들에게 이제 '포기'를 선언하고 싶을 때.

나의 정류장을 정리하고 생을 마감하고 싶을 때.

생각지도 못 했던 '기적'이 작은 기쁨이 생긴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믿지 않은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아이와 나누던 '교감'과 '행복'이 원형대로, 옹이되어 박혀 남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단 몇 초 만에 깊은 '시림'의 웅덩이에 나를 빠트리는 76세 어미가 점점 '기억'을 속절없이 잃지 않을 것을.

나의 사랑 마누라가 내일은 서너 잔만 하고 일찍 들어와 나와 '5월의 다짐'을 새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어릴 때 '쉽게 쓰여진 삶'이 계속될 줄 알았다.

흔들림 없이 걸을 수는 없었지만 반쯤 열린 사각맨홀뚜껑 밑에 떨어져 있는 오백원짜리 동전 하나를 집어 올린 날의 '기쁨'이, 연탄 가스에 중독되었던 그 날의 아침 엄니가 준 동치미 반 사발을 먹고 정신을 차렸고 엄니의 극진하게 친절한 간호를 받았던 내 인생 '단 하루의 엄니'를 보고 '아 중독이 좋은 거구나!'라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짝사랑 했던 친구가 자신의 생일 파티에 나를 안 부른 줄 알고 상심했다가 배달 사고가 난 것을 뒤늦게 알고 직접 뛰어 와 나를 자기 집으로 챙겨 갔던 그 날의 '환희'가, 나를 놀리는 다른 친구에게 농구공을 그 면상에 던지며 주먹을 날려준 착한 '우정'이 그렇게 계속 그대로 거기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세월은 갔고, 나의 유년이, 소년에서 청년으로, 그리움에서 아쉬움으로 변해갔다.

남들이 놀리는게 너무 싫어 어릴 때부터 꿈이 빨리 어른이 되는거였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누적된 어른이 되어가니 어린이일 때가 그립다.

어른이 되면 과거와 연루된 '현재'를 살기 때문에 '비관'에 기운다면, 아이들은 눈 앞의 '현재'를 직관만으로 살기에 '낙관'에 머문다. 그렇다고 어린이의 그것을 훔치려는 찌그러진 욕심을 부리면 '떼찌'다.


그래서 나의 중년은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서른 일곱, 늦게 결혼했다. 원래 남자들이란 다 그런거 아닌가? 여자보다 철 없는? 총각 파티도 해봤어야 하는데 난 못해봤다. 얕은 아쉬움이다.

아무튼 나는 결혼 직후부터는 아니고 아이가 두 살, 내가 마흔 살이던 무렵부터 '중년'이 온 것 같다. 나는 변해갔다.

그 많던 친구, 사람들을 점점 만날 수 없었다. 마실 수 없었다. 아이가 너무 예뻐 밖에 나가 있으면 그리웠다. 마늘도 사람을 좋아하고 활발했기에 나는 아이 곁을 점점 더 자주 지켜야 했다.

아이의 출생이라는 변곡점이 나의 새로운 'era'를 태동시켰다.


그런데 나의 진짜 '중년'은 올해부터인 것 같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몰랐다. 내가 이렇게 글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될지.

결혼 후 10년간 거의 책 한 줄 보지 않았다. 숱한 중층과 병렬의 역할들에 절여져 있었고 집에 오면 널부러져 리모컨을 들었다. '말초'와 '시각'의 노예가 되어 갔다.

아이가 커갈 때 책을 읽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꾸준하지 못했다. 저질 체력 때문이었다. 그냥 허우적 대기만 한거 같다.

아이가 좀 컸다. 나는 갈수록 다리가 더 아팠고 술을 마시기 싫어졌다. 쓰다 보니 이웃이 늘었고 필담이 늘었다. 즐거웠다. 나의 진정한 중년은 지금이다. 깊은 맛이 좋다. 고독이 좋다.

승진을 따지며, 뒷담화를 위한 뒷담화를 해가며 자신의 비겁한 비겁함을 숨기려 드는 객들과의 객쩍은 잔들이 이제 지겹다.


그래서 지금의, 오늘의 나는

중년의 나는 점점 나 자체로 존재한다.

중년의 나는 '버릇'과 '고집'을 더해간다. 좋은 방향으로.

중년의 나는 '작은' 겁은 늘고 '큰' 겁이 줄어간다. 도전해 보고 싶다. 출간하고 싶다.

중년의 나는 그만 사용되고 싶고 사용하고 싶다. 너들의 나가 아닌 '나의 나'를 사용하고 싶다.

중년의 나는 덜 사람하고 싶고 더 인간하고 싶다. 나에게 사람은 '관계'이고 인간은 '실존'이다.


그런데. 가장 되고 싶은 중년의 모습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이다.

그래서 드는 생각은 내 마늘과 아이를 위해서 내가 나의 삶을 똑바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삶조차 나답게 살지 못하면서 마늘과 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고 손대려 하지 말아야한다.

얘네 둘한테 후지지 않기 위한 삶을 살아가겠다.

가족의 달을 맞기도 했고 5월 다짐으로 '잡글'을 마치련다.


1. 불면증을 고치려 노력하겠다. 우선 '운동'하겠다.

2. '데미안'을 깊이 읽겠다. 알을 깨겠다.

3. 계속 쓰겠다. 쉴 땐 쉬겠다.

4. '선택'과 '집중'에 힘쓰겠다. 너를 '선택'하겠지만 나에게 '집중'하겠다. 함께는 하겠다.

5. 엄마를 좀 더 챙기겠다. 더 들어주겠다. 금방 화내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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