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냇웃음은 천사의 미소라고 했던가. 하지만 속아 넘어가 선 안 된다. 배냇웃음은 그저 뇌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무작위적인 신경반응일 뿐이다.
그래서 난 이런 생물학적 자동반사에 순진하게 웃음에 의미를 부여하며 감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배냇웃음은커녕 아기는 늘 세상 모든 고뇌를 혼자 짊어지고 있는 듯 인상만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기가 나에게 처음으로 웃음을 지어준 건 4개월이 훌쩍 지나서였다.
무언가 잘못된 건 아닐까? 보통은 생후 2개월 무렵부터 사회적 미소가 나타난다는데, 왜 우리 아기는 아직도 웃지 않는 걸까. 차라리 배냇웃음이라도 보인다면 나를 보고 웃었다 믿으며 기꺼이 속아줄 용의가 있었다.
배냇웃음이야 그렇다 쳐도,
나와 처음 관계를 맺는 사회적 미소조차 늦다는 사실은 나와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을 불러왔다.
첫 의미 있는 웃음의 대상은 시어머님이었다. 좀 더 다정하고 사랑이 담긴 목소리로 안아주셔서 그런 걸까. 한 동안 시어머님이 아기에게 말씀하시는 대사와 말투, 느낌 등을 분석하고 따라 해 보았다. 그러니 비로소 나에게도 눈 맞추며 웃음을 보여주었다. 내가 너무 기계적으로만 아기를 대했나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물론 나는 진심을 다해 사랑을 속삭여줬다 생각했다.)
이렇게 나에게 의미 있는 미소를 보여준 순간,
우리는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기의 울음은 불편함을 알리는 신호이지만 감정을 공유하려는 표현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사회적 웃음이 감정적으로 표현되는 울음보다 먼저 나타나는 걸까.
아마도 이것은 양육자를 끌어당겨 생존의 확률을 높이기 위한 아기의 천재적인 전략이다. 아기는 연약하다. 그러나 생존에 있어서는 가히 경이로운 수준이다.
우리 성인들도 살아가면서 사회적 생존을 위해 긍정적인 감정으로 관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자존심이나 방어기제 때문에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본능적인 미소로 타인을 완전히 끌어당기는 아기의 기술은 그 어떤 처세술보다 위대하다.
아기가 던진 미소에 나의 온 우주가 응답해 준 순간 우리는 끊어낼 수 없는 강력한 유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