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거실 벽면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덕지덕지 붙어있는데, 그중에는 내가 그린 그림도 몇 점 끼어있다. 집에서 취미 삼아 그리는 그림들을 딱히 보관할 데가 없기도 하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벽에 붙여주는데 내 그림만 서랍 속에 들어가면 왠지 역차별인 것 같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서른 살도 더 먹은 내가 그린 그림이 대여섯 살 아이들의 그림과 나란히 붙어있으니 아무래도 눈에 확 튄다. 어느 날 벽을 쳐다보던 막내가 내게 묻는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려?"
아이들이 보는 엄마는 못하는 게 없이 다 잘하는 만능 재주꾼이다. 피아노도 더 잘 치고, 그림도 더 잘 그리고, 못하는 요리도 없고, 청소나 빨래도 금세 뚝딱 해치운다. 아이들이 엄마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마법에 대해 경탄하며 그 비법을 물어볼 때마다 나는 항상
"너도 엄마만큼 어른이 되면 할 수 있어."
라든지
"엄마는 이걸 아주 많이 해봤거든. 너보다 수백, 수천번 더 많이 해봐서 그래."
라고 시간과 반복의 힘, 혹은 노력의 대가라는 식으로 답변하곤 했다.
그런데 왠지 이날만큼은 그렇게 대답하기 싫었다. 아이가 다른 것도 아니고 '그림'에 대해서 물어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도 단순히 어른이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림을 척척 그려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왜냐하면 그림이라고 하면 졸라맨밖에 그릴 줄 모르는 어른(a.k.a 남편)이 우리 집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잘 하지만 아빠는 잘 못하는 것이 있고, 아빠는 잘 하지만 엄마는 못하는 일들이 있다. 그건 그냥 시간과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내게 재능이 있는가 혹은 내가 그 일을 좋아하는가. 나만이 갖고 있는 달란트의 영역이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 그리고 잘했어. 그래서 열심히 그렸어. 화가도 되고 싶어 했지."
평소와는 다른 답변으로, 아이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림 혹은 '미술'이라는 과목은 내가 가장 처음으로 재능을 드러냈던 영역이다. 아홉 살 때 태어나고 자란 서울 서쪽 동네를 떠나 서울 동쪽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사 온 아파트 단지에 작은 미술학원이 있었다. 언제 어떻게 해서 그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그 미술학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여름방학이면 아침 10시쯤 미술학원에 가서 오후 서너 시쯤 돌아왔었다. 선생님들이 배달시켜 먹은 점심을 옆에서 한두 숟가락 얻어먹으며, 나는 처음으로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법도 알게 되었고, 잡채밥이라는 특이한 음식도 학원에서 처음 먹어봤으며, 엄마가 사주지 않는 냉동 군만두가 얼마나 기름지고 불량한 맛인지도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세 번이 미술학원을 가는 횟수였는데 어떤 때는 학원이 없는 날에도 집 앞 놀이터에서 놀다가 슬그머니 일없이 학원에 놀러 가기도 했었다.
미술학원에서 그렇게 살다시피 했으니,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그 마음이 바로 재능이었던 것 같다. 아홉 살 가을 무렵에 선생님이 연필소묘를 가르쳐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하도 화실 죽순이라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수업 커리큘럼을 이미 탕진해서 그랬나 보다 싶지만, 다른 아이들은 배우지 않는 뭔가 더 어렵고 특별한 것을 배운다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때부터 꾸준히 소묘, 구상, 수채화 정물 같은 입시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특히 구상 디자인을 하는 걸 좋아했다. 엄마를 졸라서 서점에서 구상 디자인 도안이 잔뜩 실려있는 책을 사다가 집에서 따로 그려보기도 하고, 용돈을 모아 가장 많은 가짓수의 포스터물감을 화방에서 사 온 날은 혼자 싱글벙글 웃으며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체감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때마다 각종 선동(?) 포스터를 그려내는 대회들이 많았다. 불조심 포스터, 통일 포스터, 환경보호 포스터, 심지어 간첩신고 포스터 같은 것도 교내 대회로 열렸다. 좋아했고, 열심히 했고, 그래서 잘했고, 상도 많이 받았다. 학교장 추천으로 지방교육청 대회에도 나가고, 외부 대회에도 나가고, 어린 시절 받아온 상장의 대부분은 그림 대회에서 받아온 거였다. 상장이 늘어날수록 자신감도 쌓였고, 그맘때 어린이가 듣는 가장 빈번한 질문으로 누군가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망설이지 않고 '화가'라고 답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고학년이 되자 학원에서 예중 입시를 준비해보겠냐고 물었다. 부모님은 '그림은 취미로만' 그리라고 말씀하셨다. 중학교에 진학하기 전 미술학원을 그만두었다. 그 대신 수학이나 국어 같은 교과목 위주의 보습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평범하게 공부해서, 평범하게 대학을 갔다. 대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모든 참고서와 노트의 여백은 빼곡하게 그림 낙서로 채워졌다. 단연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수학 문제를 푼 시간보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열 배는 많았다.
그때 내가 강력하게 예중을 가고 싶다고, 미술을 공부하고 싶다고, 나중에는 미대에 진학할 거라고 이야기했다면 부모님은 마음을 바꾸셨을까? 그리고 내 미래는 바뀌었을까? 그때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데 그때는 몰랐다. 안된다면 그냥 안 되는 줄 알았고, 아니라고 하면 그냥 아닌 줄 알았다. 누군가의 뜻을 거스르고 나의 뜻을 관철시킨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특히 진학이나 진로 같은 중요하고 거대한 계획을.
아주 나중에,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우연히 대학에서 미대 수업을 들을 일이 있었는데, 캠퍼스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워 어느 날 밤에 야작을 하다 흐느껴 울었다. 밤새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이 너무 충만해서, 전공 학점은 다 포기하고 18학점을 다 미대 수업으로만 채우고 싶었다. 그때서야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누구의 강요나 부탁 없이도, 내가 좋아서 즐거워서 그림을 그린다.
"근데 왜 화가가 되지 않았어요?"
아이가 되묻는다. 많은 이야기가 속에서 스쳐 지나갔지만, 다섯 살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간추려서 대답했다.
"화가가 되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그보다 다른 걸 하길 원했어. 엄마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지만 공부에도 재능이 있었거든. 그래서 엄마는 나중에 대학도 공부 잘하는 걸로 가고, 직업도 공부 잘하는 걸로 얻고 그랬어."
그런데 아이가 내 대답을 듣고 곰곰 생각하더니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다음 질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였고,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럼 외할머니의 재능은 뭐였어요?"
그러게. 우리 엄마의 재능은 뭐였을까? 엄마의 서사는 무엇이었기에 내게 '그림은 취미로만' 하라고 말했을까. 왜 미술은 직업도 전공도 될 수 없다고 여겼을까.
내 세계에선, 우리 엄마야말로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이다. 남들은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해낼 수 있는 '준프로'의 영역에 엄마는 남들보다도 훨씬 짧은 시간에 손쉽게 도달한다. 그것이 공부가 되었건, 살림이 되었건, 공예가 되었건, 운동이 되었건 엄마에게 '남들만큼만' 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엄마에게 문제가 되는 건 재능보다는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엄마는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욕심난 게 없었다고, 그래서 그게 늘 아쉬웠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
엄마의 '전공'을 생각하면 실제 전공이었던 '간호학'보다는 엄마가 하고 싶은 전공이었다던 '화학'이 먼저 떠오른다. 중학교 때였던가, 엄마가 어느 날 화학식을 설명해주며 노트에 교과서에 나온 기초 화학식을 베껴 쓰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재미있지 않니?"
신나서 화학식을 옮겨 적는 엄마의 글씨는 아름다웠고, 그 화학식을 쳐다보는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화학'이라는 새로운 과목을 배우며 그 세계의 앎을 청했을 때, 엄마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보물창고를 하나 열어보인 셈이었다. 그날 엄마는 "사실 화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외할머니가 고등학교 선생님과 진로상담을 하고 나서 마음대로 간호학과에 지원서를 넣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려주었다. 어쩌면 내게 미술 같은 존재가 엄마한텐 화학이었던 걸까. 뼛속까지 문과인 나는 화학식이 재미있을 수 있다는 그 마음을 깃털만큼도 이해할 수 없지만, 어쩌면 반대로 엄마도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을 것이다.
"너는 미술학원에 대체 뭘 숨겨놨길래,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집에 오질 않니."
어느 날 밥상머리에서 엄마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이 질문 속엔 모녀지간이라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세계'가 녹아 있었다. 엄마는 나의 세계를, 나는 엄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나만 이해할 수 있는 나의 고유한 세계.
어쩌면 우린 그걸 재능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려?"
아이는 앵무새처럼 했던 질문을 또 반복한다. 다섯 살 아이의 특징이다. 엄마의 대답이 매번 달라지니까 그게 또 재밌어서 자꾸 같은 질문을 물어본다. 아이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비법을 들려준다.
엄마는 그림을 좋아해. 즐거워. 그리고 더 잘하고 싶어. 그림을 그릴 때는 자꾸만 그런 마음이 들어. 그래서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도 자꾸 그림을 그리게 돼. 엄마는 그런 마음이 '재능'인 거 같아. 엄마는 그래서 그림에 재능이 있어. 너도 그림에 재능이 있다면, 그래서 자꾸 그리다 보면은 잘 그리게 될 거야.
아이의 질문에 더 잘 대답해주려고 하다가, 수십 년 전 나의 이야기, 그리고 그보다 더 앞선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엄마의 이야기까지 생각이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그 생각이 뿌리가 되어 다시 아이를 향했다. 세 아이들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의 재능은 뭘까?"라는 질문으로 넘어갔다. 엄마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양분으로 삼아, 자신의 터전에 무슨 씨앗을 뿌릴지 고민을 시작했다.
아직은 어린아이들의 그 대화를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무엇이든지, 네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자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아직은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는 데에 안도했다. 하지만 과연 나는 끝까지 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고작 열두 살에 네 재능이 뭔지 어떻게 알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려고 해. '그림은 취미로만'이라고 말했던 엄마의 대답 속에 숨어 있는 말뜻이 설핏 보였다. 내 재능이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아이들, 아직 너무 많은 문이 열려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느꼈던 엄마의 불안감이 내게도 똑같이 스쳐 지나갔다.
아, 이거였구나.
엄마는 무엇이든 어렵지 않게 잘할 수 있지만, 아주 최고의 수준까지 독하게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욕심난 게 없었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해보고 싶은 마음은 늘 쉽게 차오르지만 이렇게 애매한 마음을 과연 '평생의 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 망설여진다.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아쉬웠다. 과연 이것을 재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저 지나고 보니 그것이 재능이었나 보다 할 뿐. 그게 정말 재능이었다면,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이었다면 나는 열두 살의 그 날, "부모님이 뭐라셔도 나는 미술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라고 당연히 말 한마디 더 꺼내보지 않았을까.
'재능'이란 게 뭘까.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버렸다. 이제는 서른 넘은 내 재능을 고민하는 것도 모자라 아이들의 재능까지 함께 고민해야 하는 과업이 추가되었다. 즐겁고, 좋아하고, 계속하는 그 마음이 재능이라면 만약에 전공이 되고 직업이 되어서까지도 계속 유지되었을까. 어쩌면 그건 재능이라서가 아니라 '가지 않은 길'이라서 지금까지도 이리도 애틋하고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 아닐까. 과연 나는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의 결론은 나지 않는다. 그때 아이가 또다시 똑같은 질문을 물어본다. 오늘만 세 번째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아이는 똑같은 질문을 또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