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겨울에 나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폴란드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는 11시간 비행을 말 그대로 버. 텼. 다. 3살, 5살, 9살 아이를 데리고, 주렁주렁 아이들을 양쪽에 데리고 비행기에 탔는데, 앞자리에 앉았던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승객은 불안한 듯 자꾸 우리 자리를 흘긋거렸다. 아마 뭐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손을 뻗어주기 위한 따뜻한 마음에 우리 좌석으로 그녀의 레이더를 한껏 기울였던 것 같다. 예상했던 바지만 아이들은 많이 울었고, 많이 징징댔고, 심하게 지루해했다. 특히 막내는 "언제 한국에 도착해요?"라는 질문을 열한 시간 내내 1분 간격으로 물어봤다. 아직 한참 남았어, 아직 더 가야 해,라고 타이르던 나는 종국에는 지쳐서 7시간 45분, 7시간 43분, 6시간 59분... 식으로 건조하게 계기판의 숫자를 그대로 읽어줬다. 한가득 가져온 과자와 사탕의 단맛도 초반 한두 봉지만 유효했을 뿐, 긴긴 비행에서 아이들의 지루함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기내가 많이 건조했던지 둘째는 코피를 다섯 번쯤 쏟았고,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코피는 멈출 줄을 몰랐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져왔던 물티슈는 금세 동이 나 승무원이 키친타월을 두루마리째로 가져다주었는데, 다시 돌려주기가 겸언쩍어 그대로 내 배낭에 담아온 그 키친타월은 막내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왈칵 토를 하며 다시 쓸모를 얻었다. 인천공항의 입국심사원은 "엄마 혼자서 이 아이들을 다 데리고 오신 거예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녀의 격한 반응을 보며 매일 수십 개 국가에서 쏟아지는 승객들을 지겹도록 많이 봤을 그녀에게도 이게 흔한 여행 풍경은 아니구나 싶었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지만 2019년 12월의 그날의 장거리 여행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한국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2020년의 코로나를 견디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이 그리울 때마다 그 겨울을 추억했다. 그리고 그리움에 그 힘들었던 기억은 다 잊고, 나는 또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후 4시에 바르샤바를 출발한 비행기는 보름달과 그리고 일출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검역과 격리 신고로 인해 두 시간 가까이 걸린 입국 신고가 힘들었을 뿐, 막상 11시간의 비행은 지난번 비행에 비교하자니 모든 게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둘째와 막내는 한국에 도착해서 힘들지 않으려면 비행기에서 자 둬야 한다며 스스로 잠을 청했고, 각각 세 시간씩 똑 부러지게 낮잠을 잔 데다, 일어나서도 투정 한 번 하지 않았다. 세 아이는 간식 먹고 책 읽고 비디오 보고 게임하며 각자 야무지게 시간을 보냈다. 전날 슈퍼마켓에서 물티슈 한 통을 새로 사다가 기내용 캐리어에 넣었는데 착륙할 때까지 단 한 장도 필요하지 않아 포장지도 뜯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뜯지 않은 포장지에 예쁘게 싸여있다.) 재작년 비행에서 1통을 다 쓰고도 모자라 승무원이 키친타월을 두루마리째로 가져다줬던 걸 생각해보면 실로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은 기내식도 음료도 간식도 뭐 하나 흘리지 않은 데다 쓰레기도 스스로 잘 모아 두고 화장실도 혼자 다녀온다. 어느새, 삼 남매가 이만큼이나 컸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이 많이 컸다. 매일 조금씩 서서히 크느라 아이들의 변화가 눈에 두드러지게 보인 건 아니었지만 휴대폰에 저장된 2년 전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있으면 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 세 살에서 다섯 살이 된 막내의 변화는 물론이거니와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있던 초등 저학년 첫째가 이제는 숙녀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초등 고학년 아가씨가 되었다. 세 아이의 변화는 2년이란 시간을 사이에 두고 분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방탄소년단이 작년 가을에 발표한 신곡 'Life goes on'은 '어느 날 세상이 멈췄어'라는 노랫말로 시작한다. 내 마음도 그랬다. 코로나 때문에 지난 1년 반 동안 모든 게 멈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허무하게 멈춰있었다고 생각한 지난 시간 동안, 지루하게 흘러가고 낭비했다고만 생각했던 그 시간 동안, 알고 보니 세상은 멈춰 있지 않았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소리 없이 자라고 커서, 어느덧 11시간의 장시간 비행을 끄덕 없이 해내는 어린이로 성장해 있었다.
힘들게 애써 버티기만 했었던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기르고 자라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이렇게나 쑥쑥 자랐는데, 그 먹이고 보듬고 가꾸고 키우던 시간들을 왜 낭비했다고만 생각했을까.
2년 만에 손주들을 만나는 부모님의 눈에는 그 변화가 더 선명하게 보였을까.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니 그날이 그날 같고 시간은 멈춰있는 것만 같은데... 11시간 비행이라는 도전적인 과제 덕분에 아이들의 성장을 생생하게 체감했다. 아이들은 자랐고, 엄마는 그만큼 더 많은 도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가슴 벅찬 사실을 깨달았다.
2주간의 자가격리도, 아이들이 자란 만큼 수월하게 지나가겠지. 격리 해제 후, 부쩍 자란 아이들과 함께할 본국에서의 여름방학을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