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정현 Feb 15. 2021

육아의 제1원칙은 '기다림'이 맞을까?


나 점점 아이가 하는 말을 더 못 알아듣겠어.



 남편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인터넷 신조어를 습득하기 시작한 10대 큰딸의 이야기가 아니다. 혹은 영어나 폴란드어를 들리는 대로 그대로 따라 하며 제3의 언어를 창조하는 7살 둘째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것은 조음음운장애를 갖고 있는 50개월 막내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 아들에게 장애가 있어요,라고 공개적으로 떠벌이기 싫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 확실히 문제가 있긴 하다. 앞서 키웠던 손윗형제들과 비교해도 문제가 꽤 두드러지지만, 대학원에서 임상심리를 전공했던 내가, 그래서 비슷한 개월 수의 아이들을 많이 만나보며 언어치료에서 살짝 발 좀 담가봤던 내가 평가하기에도 또래보다 문제가 좀 심각한 편이다. 이건 본격적으로 말이 트이기 전인 20개월 무렵에 아이가 해외에 나와 살게 된 것 때문일 수도 있고, 그나마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1년 가까이 가족 외에는 다른 타인들을 거의 만난 적 없었던 것 때문일 수도 있으며, 그냥 모든 환경적인 영향을 배제하고 원래 그럴 아이였기 때문에(예를 들면 혀의 구조적 이상 때문이라든지) 그럴 수도 있다. 아직 원인은 아무도 모른다. 


 가족들은 그래도 아이가 하고자 하는 말의 문맥을 알고 있고 평소 아이가 특정 단어들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굴 먹고 싶다'라고 얘기하면 생굴이 아니라 과일인 귤이 먹고 싶은 것이고, '돌려요'라고 얘기하면 나사 따위를 돌리는 게 아니고 졸리다는 얘기다. 문제는 가족 외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두드러진다. 아이랑 같이 있을 때 내가 타인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뭐라는 거예요?"라는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내 얼굴은 해실 해실 웃고 있지만 입꼬리 끝은 부들부들 떨린다. 정말 궁금해서 되물어보는 것일 텐데,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한 번씩은 꼭 물어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될 때마다 상처가 되어서 내게 돌아온다. 혹은 그보다 좀 더 무례한 형태로 변형된 문장인 "아이가 왜 저렇게 얘기해요?"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때는 정말 예의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당신은 왜 그렇게 얘기하는데요?"라고 되묻고 싶었다. 


 무엇보다 가장 상처를 받는 건 아이 본인이다. 어느 날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oo가 내가 하는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며 휙 가버렸어."라고 말했다. 대여섯 살 또래 아이들에게 상대방이 뭐라고 말하는지 찬찬히 귀 기울여 듣고 뜻을 유추하는 진득한 인내심을 바랄 수는 없겠지만, 그 순간 내 아이가 느꼈을 감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좀 많이 아프다. 나를 두고 '휙' 가버리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단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은 벌어진다. 아이가 조금 복잡하고 어려운 문장을 이야기할 때마다 "미안한데, 내가 제대로 못 알아들어서 한 번만 더 얘기해줄래?"라고 되물으면, 기분이 좋을 때는 선선히 다시 얘기해주다가도, 예민하고 민감한 이야기일 때는 벌컥 화를 내곤 한다. 엄마로서는 정말 제대로 잘 들어야 했던 이야기였는데 그걸 알아듣지 못했으니 미안할 따름이고, 아이는 겨우 용기 내어 밖으로 내보인 마음을, 한 번도 힘들었는데 두 번, 세 번 계속 그 과정을 반복해야 하니 짜증 나고 서럽다. 내 발음이 너무 어설퍼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건,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인간관계에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아이가 커갈수록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고, 표현이 다채로워졌다. 예전에는 단순하게 먹을 것을 요구하거나,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말하는 데에 그쳤다면, 아이는 이제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모든 과정을 인과관계나 시간 순서에 따라 제법 조리 있게 구성해서 전달하기도 하고,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봤던 재미있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신나서 떠들기도 한다. 그런데 여전히 발음이 많이 엉성하다. 그만큼 뜻을 유추하기도 더 어려워졌고, 남편과 나의 걱정은 요즘 들어 더 심각해졌다.  


 하지만 남편이 한숨을 쉬며 건넨 말에 나는 '아직은 기다려야 할 때'라고 답했다. 그리고 큰애가 다섯 살이었을 때, 그러니까 지금 막내랑 똑같은 나이였을 때 아이가 말을 많이 더듬어서 걱정했던 거 기억나냐고 되물었다. 그때 정말 모든 문장마다 아이가 말을 더듬어서, 그래서 우리가 한창 걱정 많이 했던 거 기억나? 하고 물었더니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남편은 그저 멍 하게 내 얼굴을 응시할 뿐이었다. 정확히 3초 후, 남편이 갑자기 불현듯 떠오른 듯이 "아! 그래! 진짜 그랬다. 걔 정말 말 많이 더듬었었지. 와, 진짜 그때 되게 심각했었는데.... 어떻게 나 그걸 까먹을 수 있지?"하고 신기한 듯 웃으며 답했다. 그랬다. 어느새 6년 전의 일이라 우리 부부의 기억 속에서 홀랑 사라져 버린 일이었지만, 분명 큰애가 어렸을 때도 우리는 아이의 언어문제로 깊이 고민했었다. 


 아이가 세돌 무렵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사했었다. 큰애는 또래에 비해 언어 습득이 빨랐고 이미 그 나이에 한국어는 거의 완성된 상태였지만, 영어라는 제2의 언어가 자리잡기 시작하자 아이는 한국어를 조금씩 더듬거렸다. 마치 하드디스크 용량이 가득 찬 컴퓨터에서 고화질의 비디오 파일을 재생할 때처럼, 아이의 뇌 속 뉴런이 생각을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한국어의 뇌에 접속해야 할지, 영어의 뇌에 접속해야 할지 버벅대는 것처럼. 유.. 유.. 유치원에서 있잖아, 하며 아이가 말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미 온 신경은 아이가 말을 더듬는 순간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걸 내색하지 않으며 빠르게 아이의 이야기로 집중을 옮겨와야 했다. 말을 더듬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최악의 반응은 아이가 말을 더듬는다는 걸 스스로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을 하도록 요구한다든지, 왜 말을 더듬느냐고 따져 물으면 아이는 오히려 당황스러워하거나 불안해하며 말을 더듬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게 되고, 이는 말더듬을 더욱 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사실 말더듬은 아이들 사이에서 꽤 흔하게 나타나는 문제이며, 특히 이중언어를 학습하는 아이에게는 더 흔한 문제이다. 아이가 말을 더듬더라도 그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고, 아이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하며, 그저 기다려주면 대체로 대다수의 아이들의 말더듬은 수개월 이내에 저절로 사라진다. 큰 애의 경우는 6개월 정도 걸렸다. 


 조음음운장애는 말더듬문제와 조금 다르다. 이미 만 50개월이 지났는데도 자연스럽게 구현되지 않는 발음들이 있다면, 아니 우리 아이처럼 좀 많다면, 치료적인 개입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해외에 살면서 한국어 발음을 교정해주는 언어치료사를 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누가 치료적인 개입을 해줄 수 있을까? 다른 대안은 없으니 엄마인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에게 내가 '아직 기다려 보자'라고 이야기한 것은 내가 '그냥 엄마'에서 '엄마 치료사'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기도 하고, 아직은 치료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아이와 나의 관계가 본디 '치료사-내담자'의 관계가 아니고 '부모-자식'의 관계이기 때문에, 괜히 치료적 개입을 하겠다고 섣불리 나섰다가 더 본질적인 관계가 악화될까 봐, 엄마이기에 오히려 아이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치료를 해야 한다면 가장 효과적인 때에 가장 짧게 개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 아이가 글자를 깨치게 될 때까지, 치료적인 개입은 잠시 미뤄두자고 이야기했다. 조음음운장애의 경우 음운인식능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아동의 연령도, 조음 능력도 아닌 글자 읽기 능력이다. 


 그런데 나는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조음 치료 워크북을 넣어둔 지 이미 오래고, 틈만 나면 관련 논문도 자꾸만 들여다보고 있다. 심지어 아동용 발음 평가 한국어판도 구비해놨다. 겉으로는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전혀 그러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모든 엄마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이 내게도 있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최신 연구논문이 어쩌고, 전문가의 의견이 어쩌고 하더라도, "지금 기다리는 게 맞을까?" "혹시 괜히 기다리다가 골든타임을 놓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만약에 내 아이가 아니라 센터에서 만난 아이였다면, 부모님에게 '조금 기다려보도록 해요.'라고 말하면서 뒤로는 이렇게 딴짓하고 있지 않았을 텐데. 아주아주 쿨하게, 적절한 발달 연령까지 기다렸을 텐데. 그러니 남편에게는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아이에게는 아직 어떠한 개입을 할 때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남몰래 이것저것 찾아보고 걱정하는 내 모습이 낯설면서도 우습다. 그리고 또 하나를 깨닫는다. 십여 년 전에 그저 배운 것에 따라, 치료 이론에 따라 '아직은 개입할 때가 아닙니다. 조금 더 기다려보죠'라고 덤덤하게 말했을 나를 떠올리면서. 그때 그 부모들은 얼마나 속이 탔을까. 얼마나 불안했을까. 부모 마음이란 게 뭔지도 모를 20대 젊은 치료사가 얼마나 못 미더웠을까.  


육아는 사람의 성장과 발달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기다림이다. 아이들의 신체조건이나 지적능력은 부모가 재촉한다고 해서 발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모라면 그들처럼> 242쪽.


 그래서 오늘 글의 제목은 의문형이다. 기다려야 한다고, 육아 문제의 태반은 기다리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들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정작 그 문제의 한가운데에서 한창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냥 진득하니 기다려보려고 애써도 가슴 한 켠에 솟아나는 불안감은 어쩔 수가 없다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자꾸 되묻게 된다. 


육아의 제1원칙은 과연, '기다림'이 맞을까?

정말? 맞아? 그냥 기다려도 돼?

나 혹시 지금 큰 실수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