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C-Program의 해외특파원들은 Universal, Inclusive, Accessible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각 국가의 도서관이 어떻게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환경을 제공하는지 취재하기로 했습니다. 폴란드 특파원인 저는 약 2년 전에 폴란드의 공공도서관에 대한 소개글을 제3의 공간 매거진을 통해 발행한 적이 있는데요, 어린이 도서 공간을 따로 분리하거나 독립하지 않고, 입구에서부터 어린이를 환영하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폴란드의 동네 도서관들을 소개했었고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읽어주셨습니다.
공공도서관에 대해서는 이미 한 번 취재했었고, 3월에 코로나 2차 대유행으로 폴란드의 많은 공공시설이 문을 닫은 상황이어서 저는 이번 글에서는 '학교도서관'을 중심으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저희 집 삼 남매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 바르샤바 미국 국제학교(American School of Warsaw; 이하 ASW)에는 꽤 큰 규모의 도서관이 있습니다. 학교의 공용어인 영어 도서를 기본으로 하되, 폴란드어, 독일어,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한국어 책도 약 200여 권 보유한 다국어 도서관입니다. 이는 이 학교에 재학 중인 천여 명의 학생들의 국적이 50개 이상이라는 걸 고려할 때 꽤 자연스러운 현상인데요,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을 위해 학교의 많은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죠. ASW의 도서관은 그뿐만 아니라 재학 학생들의 연령인 만 3세 아이들부터 12학년 고등학생, 그리고 학부모들과 선생님들까지 자유롭게 이용하는 모든 연령을 위한 도서관이기도 합니다.
이미지 출처: ASW 도서관 홈페이지 https://aswarsaw.libguides.com/home/about
학부모인 저는 원래 2019년까지 이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제 대출카드로 최대 여섯 권, 방학중에는 30권의 책을 빌릴 수 있었는데요, 2020년 팬데믹 이후 현재 도서관은 방역을 위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만 오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학부모인 저는 출입할 수 없어요. 안타깝게도 이번 글에서는 학교에서 가장 긴 휠체어 경사로가 있고, 영유아를 위한 공간에서부터 성인들을 위한 세미나 공간까지 모두 완벽하게 구비한 이 도서관의 Inclusive 하고 Accessible 한 공간 디자인을 직접 보여드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다만 학교도서관이 지난 1년 동안 학생들에게 제공했던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학교 도서관이 Inclusive Learning Model의 관점에서 학생들을 위해 어떤 배려를 하는지, 어떻게 교육자 중심이 아닌 학습자 중심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2018년까지 한국에 살았고, 한국에서 공립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이곳 바르샤바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게 되자 많은 것들을 한국과 비교해서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오늘 글에서도 몇몇 포인트는 이 곳 폴란드의 학교도서관 프로그램을 한국의 현재와 비교해서 분석해보려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권장도서목록이 왜 똑같은 형식이죠?
4년 전,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이는 3월에 한 권의 책을 받아왔습니다. 학교에서 발행한 권장도서목록과 독후감 노트가 그것이었는데요,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일련의 표로 추천도서가 적혀있었습니다. 당시 받았던 책을 찾아보려 했는데 해외 이삿짐 속에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네요. 학교 홈페이지에서 작년도 권장도서목록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그동안 익숙하게 만나보셨을 그 권장도서목록처럼 생겼습니다.
자,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 학생이 이 작은 글씨로 쓰인 도서목록의 책이 무엇인지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요?
책 제목, 저자, 출판사명, 출판연도와 같은 서지정보들. 어른들이 보기엔 평이한 도서목록이지만, 이 목록을 가지고 학교 도서관에 가서 원하는 책을 찾는다는 건 어린이 입장에서 꽤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학생 수는 많고 도서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책 권수는 적으니 책이 대출 중이라 구할 수 없는 경우도 많고요. 그렇지만 학년 말까지 일정 권수 이상을 읽어오는 게 학교 과제였습니다. 그렇다면 학교 권장도서목록에 있는 책을 빌려야 하는 것은 누구의 몫이 될까요? 바로 엄마들의 몫이 됩니다.
저는 아이가 1학년 때 권장도서목록을 핸드폰에 엑셀 파일로 저장해서 항상 들고 다녔습니다. 이 많은 책을 모두 새 책으로 구입하려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고, 학교 도서관에서는 대출이 어려우니 엄마가 발품을 꽤 많이 팔아야 했지요. 중고서점에서 저렴하게 책을 구입하거나 지역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도 있고, 이 학년별 권장도서목록이 개교 이래 한 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보다 1, 2년 먼저 같은 학교에 아이를 보낸 선배 엄마들이 예전에 어쩔 수 없이 구입했던 열 권 남짓의 책을 학기 초에 물려주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발품을 팔아 책을 구하고, 아이는 그 책을 받아 읽고 독후감을 쓰고.... 다시 다음 학년에 진급하면 똑같은 활동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일관된 한국의 일반 초등학교의 학교 도서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책의 난이도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높아지지만, 제공되는 도서목록의 형식이나 관련 독후 활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어요.
지금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 이하(Early Year)와 초등학교(grade 2-5), 고학년(grade 6 이상)이 서로 다른 형태의 도서관 권장도서목록을 받습니다.
ASW Early Year Reading Challenge (출처: ASW LIBRARY homepage)
위 이미지는 초등 1학년 이하 학생들을 위한 권장도서목록입니다. 먼저 책 제목보다 표지가 먼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아이들이 직관적으로 무슨 책인지 바로 알 수 있겠죠? 그리고 취학연령이 한국보다 반년 앞선 미국 학제 기준상, 1학년 학생들이라 해도 아직 만 여섯 살 전후의 아이들이라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는 학생들은 많지 않습니다. 책을 빌려오더라도 옆에서 읽어주는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죠. 그럴 경우를 대비해 학교에서 제공된 권장도서목록을 클릭하면 Tumblebook 웹사이트로 바로 연동되어서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기능이 있는 전자책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물론 Tumblebook 웹사이트와 같은 전자책/오디오북 인프라가 갖춰진 것은 더 많은 독자를 보유하고 어린이 도서시장이 큰 영어책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접근성을 위해 개인별 태블릿 PC를 제공하고, Tumblebook 유료계정을 학교 차원에서 구입하고, 해당 서비스로 제공되는 도서목록 내에서 아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을 고르는 수고를 더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웅진과 같은 몇몇 어린이 도서출판 회사에서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니 초등 교육과 공식적으로 연계된다면 좋은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외에도 Storyline Online, Unite for Library, 그리고 Epic과 같은 온라인 도서관 서비스 페이지를 제공하며 더 많은 책을 개인의 취향에 따라 스스로 찾아볼 것을 권합니다. 이런 웹사이트 추천목록은 권장도서목록의 두 번째 페이지에 함께 있었는데요(상기 이미지에서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유료계정 정보가 그대로 드러나서 제가 삭제하였습니다), 두 번째 페이지는 보시다시피 책 목록이 텅텅 비어있습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원하는 책을 스스로 골라 읽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한국에서도 학교차원에서 제공되는 권장도서목록의 실효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과연 아이들에게 꼭 읽어야 할 책을 정해주는 것이 필요한가. 책을 직접 고르고, 성공하거나 실패하며, 점차 자신의 취향을 알아가는 것도 독서교육의 한 과정이 아니겠냐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21권의 책을 읽는 것이 독서 챌린지의 목표이되, 굳이 사서 선생님이 정해준 책일 필요는 없다고, 아이가 원한다면 자유롭게 스스로 고른 책들로 빈칸을 채워보길 권하는 두 번째 페이지가 반갑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목록에 있는 책은 스무 권인데, 독서 챌린지 제목은 '21 FOR 2021'이네요. 스물한 번째 추천도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Read in Unusual spot; 평범하지 않은 장소에서 책 읽기'였습니다. 책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 경험을 추천한다는 의미입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굉장히 재미있고 독특하지 않나요?
이런 재미있는 독서 경험의 추천은 고학년에서 더 다채롭게 이어집니다.
초등 2학년 이상, 5학년 이하의 권장 독서목록입니다. 책 제목은 적혀있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다양한 장르의 책을 골고루 편식 없이 읽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다양한 책의 분류가 적혀있네요. 이것은 novel, non-fiction, cookbook 같은 장르에 대한 분류이기도 하고, book about holiday, a sports story, a book about school과 같은 주제에 대한 분류이기도 하며, a book that has been make into a movie(영화화된 책)라든지 a book someone recommended to you(누군가 추천해준 책)처럼 책에 대한 다양한 만남의 기회를 기준으로 분류된 카테고리이기도 합니다. 저학년 학생들의 스물한 번째 추천리스트였던 Read in Unusual spot(평범하지 않은 장소에서 책 읽기)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네요.
책 제목이 없는 권장도서목록이라니, 제 눈에는 꽤 신선하게 다가왔는데요, 그렇다면 초등 6학년 이상의 고학년을 위한 권장도서목록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blog or magazine이나 podcast처럼 저학년 독서목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카테고리들이 보입니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독서 챌린지라고 하면 '책'만 떠올렸던 고지식한 저에게 또 새로운 충격이었어요. 이미 많은 아이들이 책 바깥의 세상에서 더 다채로운 텍스트를 접하고 있는데 더 이상 아이들에게 책만 읽으라고 고집할 수는 없겠죠. 오히려 이 기회에 최신 정보를 습득할 수 있고, 정보의 신뢰도가 높은 블로그나 팟캐스트 채널을 알게 된다면 그게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방향 아닐까요?
Classic이나 Books over 300 pages 같은 한 단계 더 발전된 독서 경험을 요구하는 카테고리도 보입니다. 사서가 단순하게 '이 책을 읽어라'라고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어떤 독서 경험이 필요한 지 고민한 흔적이 느껴집니다. 고학년 이상의 책 추천목록에 사서가 책 제목을 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 학교가 국제학교라는 특수한 배경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어요. 학생들 중 많은 비율의 학생들이 영어가 아닌 제 2, 제 3의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합니다. 부모님의 국적이 서로 달라 다중언어를 사용하는 가정도 많고, 사회에서 쓰이는 언어는 폴란드어, 학교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 교과목으로 배우는 언어는 프랑스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나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요. 사서가 학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인 영어로 된 책만 추천한다면, 모국어 독서 능력이 더 좋은 학생들에게는 참가하기 어렵거나 혹은 흥미롭지 못한 독서 과제일 수 있겠죠. 학교 도서관 사서가 출판된 모든 책을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학생들의 모국어로 된 책에 대해서는 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의 자율성을 존중해주되 편식 없이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학교의 독서 챌린지의 목표입니다. 실제로 저희 아이도 독서 목록의 절반은 영어책으로, 나머지 절반은 한국어 책으로 채워 갔습니다.
도서관에서 권장도서목록을 만들 때, 이 목록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책을 추천하는 행위의 목표는 무엇인가. 읽는 독자를 배려한 도서목록은 무엇일까. 그리고 과연 어린이들은 이 추천목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이 목록이 어떻게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 그런 생각이 곁들여진다면 한국형 권장도서목록은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학부모 사서는 바코더를 찍는 사람, 혹은 책을 소개하는 사람.
"외국 사서는 과제할 때 논문 찾아주는 사람, 한국 사서는 대출할 때 바코드 찍어주는 사람?"
작년에 출간된 김지우 작가의 책, <사서가 바코디언이라뇨>의 소개글 첫 문장입니다. 도서관 사서는 바코디언이 아닙니다. 저는 20대 초반에 모교 대학도서관에서 시급 5000원을 받고 책에 바코드를 붙이는 일을 한 적이 있는데요, 청춘을 바쳐 약 200시간 정도 일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저는 사서가 바코드를 붙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남들보다 일찍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사서 선생님들의 일이 아니라 저 같은 하청 아르바이트생의 몫이었으니까요. 심지어 저를 관리 감독하시는 분도 사서가 아니고 공익근무요원이었습니다. 흠흠.
이야기가 조금 밖으로 샜지만, 한국에 있을 때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학부모 일일 사서를 모집한다는 말에 냉큼 손을 든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도서관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거든요. 아이가 다니는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 동안 사서로 일해볼 수 있다니, 얼마나 즐거운 봉사였던지요. 한 학기에 두 번, 토요일 출근을 하지 않는 사서 선생님을 대신해서 학교 도서관의 문을 열고, 컴퓨터 시스템에 접속해서 아이들의 대출, 반납을 도와주는 일, 책상에 앉아 바코드를 찍는 일을 맡았습니다. 사서 선생님의 책상에 엄마가 앉아있는 걸 재미있게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나네요.
폴란드에 이사 온 이후,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도 학부모 도서관 프로그램 봉사를 구한다는 모집글을 보았습니다. 도서관을 사랑하는 저는 또 냉큼 손을 들었지요. 책을 정리하거나, 찢어진 책을 수리하거나, 혹은 늘 저와 운명같이 엮였던 바코드와 관련된 일을 할 줄 알았는데 모두 다 아니었습니다. 제게 맡겨진 역할은 '미스터리 리더'였어요.
당시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미스터리 리더 Mystery Reader'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아이들이 전혀 모르는 언어,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앞으로도 만나기 어려울 외국어로 된 그림책의 세계에 아이들을 초대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앞서 밝혔듯이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국적은 50개국이 넘는데요, 학생들의 다채로운 국적만큼이나 학부모들의 국적 또한 다양합니다. 학교에서는 그것을 이용해 학부모를 '새로운 외국어 책을 소개하는 사람'으로 초빙한 것이지요.
도서관에 가서 아이들에게 한국어 책을 읽어주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모르는 언어로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라 '미스터리 리더'였던 거예요.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아이들에게 한국어 그림책을 읽어준다니. 어쩌면 몇몇 학생들에게는 한국어 소리를 처음 들어보고, 한국어 책을 처음 접해보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을 거예요. 그리고 책의 그림을 보며 낯선 외국어의 의미를 마음껏 상상해보는 기회이기도 하겠죠? 저는 한국어로만 된 책을 줄줄 읽어주면 그 소리가 아이들에게 불경처럼 들릴 것 같아, 한국어와 영어가 적절하게 섞인 책을 읽어주기로 했습니다. 이민 작가인 Julie Kim 작가님의 <Where's Halmoni>를 골랐는데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베스트 10에 드는 책이기도 하고, 또 마침 이 책이 학교도서관에도 있었습니다.
JULIE KIM 작가님의 WHERE'S HALMONI. 정말 재미있는 책입니다. 위에서 소개했던 독서목록의 a funny book 카테고리에 채워넣을 수 있을만큼요.
이날 미스터리 리더 섹션이 끝나고, 그림책 코너에서 제가 읽어준 <Where's Halmoni>를 대출창구로 가져가던 어느 친구의 뒷모습이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모릅니다. 매우 뿌듯한 순간이기도 했고요. 누군가에게 책을 소개해주고, 그 책을 통해 또 새로운 세계와 문화를 접하게 되는 것.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가 소개한 책은 한동안 어린이 서가에서 가장 잘 보이는 맨 윗 칸 전면 책장에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도서관 앞 게시판에 '미스터리 리더가 소개한 책'으로 사진과 함께 전시되기도 하고요. 한국 학교에서 도서관 운영에 학부모를 참여시키는 방법과 이곳 학교에서 학부모를 참여시키는 방법은 이렇듯 사뭇 달랐습니다. 한국에서의 일일사서는 바코디언이었던 반면 이곳에서의 일일 사서는 북큐레이터에 가까웠습니다.
이날의 미스터리 리더 섹션은 Inclusive Learning Model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영어가 주요 소통 언어로 쓰이는 학교에서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메인 무대로 올리는 프로그램이기도 했습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이들이 평소 영어 중심의 학교 교육에서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면 반대로 이런 행사를 통해 그들이 소외되지 않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다문화, 다국적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기억에 남을 순간이었는지는 모두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죠. 실제로 아이는 아직도 이날의 경험을 선명히 기억하고, 이 책을 펼칠 때마다 종종 이야기합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모두 다 함께 엄마가 읽어주는 한국어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순간을요.
학부모도 대출할 수 있는 학교 공동체의 도서관
예전에 한국 초등학교에서 일일 사서로 일했던 순간의 경험을 조금 더 되살려보자면, 봉사 기간 동안 제 흥미를 이끌었던 것 중 하나는 교사 신청도서 코너였습니다. 초등학교 내의 학교도서관이다 보니 아동/청소년용 도서가 대부분이었는데, 사서 책상 바로 옆 공간에 책장 두 칸 분량의 성인 도서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그 위에 '교사 신청도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꽤 재미있어 보이는 신간 소설과 육아서, 교육서들이 많아서 한참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나요. 그중엔 빌려가고 싶은 책들도 몇 권 있었습니다. 살짝 고민하다가 아이의 학년, 반, 번호를 넣고 아이 이름으로 책을 한 권 빌렸습니다. 제 욕심 때문에 아이가 한 번에 빌려갈 수 있는 책 권수가 하나 줄었으니 아이는 다소 시무룩해했지요. 그러나 모처럼 엄마와 학교 도서관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으니 기꺼이 자신의 대출권수를 희생(?)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는 학부모도 따로 대출카드를 만들어 책을 빌려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초등학생인 아이들은 한 번에 세 권씩만 대출해갈 수 있는데, 성인인 저는 그 두 배인 여섯 권을 빌려갈 수 있습니다. 남편 대출카드까지 가져오면 한 번에 열두 권까지 책을 빌려갈 수 있고, 여름방학을 앞두고서는 대출권수를 서른 권까지 늘려주기 때문에 다섯 식구의 대출 권수를 다 합치면 150권까지 빌려갈 수 있습니다. 여름방학 동안에 책에 푹 빠져 지내라는 학교의 배려이지만, 너무 욕심내서 책을 빌리다가는 매우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다음 학기에 가뜩이나 바쁠 신학기에 150권의 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반납하러 가는 저를 상상한다면 욕심을 조금 내려놓아야 합니다.
종이책뿐만 아니라 전자책 도서관 데이터베이스의 인심은 더 후합니다. 사실 학교 계정만 있으면 24/7 방문 가능한 전자책 사이트들이 수두룩하니까요. 이와 같은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는 작년 3월 휴교령 이후 진행되었던 온라인 수업에서 더 빛을 발했는데요, 사서 선생님은 비대면 수업기간 동안 학생들이 학교 도서관 바깥에서 원하는 정보에 접근하는 법에 대해 따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ASW library database
온라인 수업에 대한 주제를 조금 더 소개하며 이번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학교의 도서관 프로그램은 어떻게 운영되어 왔을까요? 이 부분은 한국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는 제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이라 직접 비교는 어렵겠고, 아이가 경험했던 도서관 인프라를 중심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몇몇 컨텐츠를 소개해보려 합니다.
ASW virtual library for elementary school
학교는 작년 팬데믹 이후부터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Virtual Library라는 것을 운영하였습니다. 앞서 독서 챌린지에서 소개했던 Tumble book, Storyline Online, Unite for Library, 그리고 Epic과 사이트 외에도 Audible이나 World Stories 같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전자책 데이터베이스 사이트가 모두 소개되어 있어요. 그 외에도 International Children's Digital Library라는, 59개 언어로 전자책을 제공하는 데이터베이스도 구비하고 있습니다. 국제학교다운 면모지요?
재미있는 점은 이 버추얼 도서관에 'Coronavirus for kids'라는 섹션이 상위 메뉴로 따로 개설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수업을 해야 하는 아이들이 학교 도서관에 오면 어떤 정보를 제일 찾고싶어 할까. 버추얼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서 선생님이 아이들이 무엇을 필요로 할지 깊이 고민해봤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학습자 중심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간편하게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따로 세션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지요.
코로나 바이러스 정보 세션에 가면, 초등학생들이 쉽게 이해하고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중에서 'Princess Black and the case of the coronavirus'라는 책을 아이와 함께 읽었어요. 아이가 즐겨 있는 시리즈물이거든요. 바로 전자책이 실행되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코로나바이러스 예방 방법들이 만화로 쉽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상위메뉴인 Book Related Activities나 Home Learning Resource에 가면 다양한 독후활동 자료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Dr. Seuss나 Eric Carl, 혹은 Mo Willems와 같은 유명한 그림책 작가들의 책을 읽고 난 후 할 수 있는 독후활동들부터 과학 도서를 읽고 난 후 할 수 있는 탐험활동 같은 것들이 다양한 활동지로 정리되어 있어요.
그리고 매주 온라인으로 만나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직접 책을 읽어주는 시간을 운영했는데요, 특이하게도 4월 22일 지구의 날에는 사서 선생님이 책을 읽어준 게 아니라 교장 선생님이 책을 읽어주셨어요. 교장선생님이 읽어주는 그림책 동영상도 살짝 공유해봅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 <모든 이가 스승이고, 모든 곳이 학교다>에 실려있는 김신일 교수님의 인터뷰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학습할 권리가 있고, 다른 사람은 그저 도와줄 뿐입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학습을 도와주고 북돋아 줄 수 있는 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글이었어요. 아이들의 학습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고, 학습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진정한 교사의 권리라고도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두 곳의 학교 도서관을 비교할 때, 학교라는 틀,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같았지만 학습자인 학생 입장에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서로 보이는 모습은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폴란드 국제학교의 도서관이 Inclusive Learning Model의 관점에서 학생들을 위해 어떤 배려를 하는지, 어떻게 교육자 중심이 아닌 학습자 중심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지 이야기해봤습니다. 지극히 다양한 학습자들이 모여 있는 국제학교의 도서관의 사례 속에서는 한국의 도서관에도 적용해볼 만한 것들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도서관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진짜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 그 작은 배려와 생각에서 출발한 프로그램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