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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Oct 25. 2024

옷장에서 겨울 패딩을 꺼내며


 대체 가을이 언제 오나 애타게 기다리던 게 겨우 한 달 전의 일인데, 몇 주 사이에 겨울이 코 앞에 다가온 것 같습니다. 이제야 단풍이 옷을 갈아입는 것 같은데, 어제는 절기상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었대요.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오늘은 처음으로 옷장에서 패딩을 꺼내 입었어요.


 폴란드에 사는 동안 패딩은 사계절 옷이었는데, 길고 긴 여름을 보내고 겨울 옷장에서 오랜만에 패딩을 꺼내 오니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문득 바르샤바의 날씨가 궁금해서 오랜만에 날씨 어플을 켜 보았습니다. 이 글을 쓰는 10월 24일, 오늘 바르샤바 날씨는 최저 1도네요. 폴란드에서는 진즉에 모두가 패딩을 입고 있었을 것 같아요. 여름에도 가끔 이상 기온으로 15도 아래로 온도가 훅 떨어지는 게 폴란드 날씨입니다. 그러니 7월에도, 8월에도 패딩을 옷장에 집어넣을 수가 없어요. 외출 복 옷장에 경량 패딩은 사시사철 필수입니다. 패딩이 사계절 내내 입는 옷이라고 이야기하자니 저희 아이들이 8월 개학날 패딩을 입었던 날의 추억이 떠오르네요.


 엄청 추웠던 그 여름은 아마 재작년 즈음의 개학날이었을 거예요. 일기 예보를 확인해 보니 아침 기온이 10도 아래로 떨어지길래 옷장에서 경량 패딩을 꺼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패딩은 너무 오버스러운 것 같아 싫다며 거부하는 거예요. 게다가 오랜만에 학교에 가는 첫날, 예쁘게 입고 가고 싶을 텐데 패딩은 아무래도 좀 칙칙하잖아요? 적당히 기모 후드티 정도로 타협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하루종일 야외에서 놀텐데 싶어 겨우겨우 아이들을 설득해서 패딩을 입혀 보냈습니다. 훅 떨어진 기온도 문제였지만, 바람이 정말 매서웠거든요.


 다행히 한낮에는 햇볕 덕분에 기온이 그럭저럭 올라갔고 아이들 말마따나 패딩이 좀 짐이 되진 않았을까 걱정하던 오후,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표정이 싱글벙글 밝았어요. 엄마!!! 오늘 운동장에 털모자에 털장갑 끼고 온 애들도 있었어! 패딩도 엄청 많았어!!


 저는 차마 8월에 털모자, 털장갑을 입힐 생각은 못했는데. 저보다 한술 더 뜨는 엄마들도 있었군요. 추운 날, 약간은 오버스럽게 아이들을 입히는 엄마들의 마음은 역시 만국 공통이었나 봅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가끔 이날의 추억을 떠올리는데요, 아마 한여름(?)에 털모자에 털장갑을 끼는 특별한 광경이 황당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가을 같은 여름을 8, 9월에 보내고 나면, 폴란드의 겨울은 다른 나라보다 한 두 달 빠르게 다가옵니다. 어쩌면 곧 눈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옷장에서 겨울 패딩을 꺼내면서 아이들 패딩도 같이 꺼내 정리합니다. 올해 4월까지 입었던 패딩인데도 살짝 작아 보여요. 아이들이 그새 쑥 컸나 봐요.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는 성별은 같아도 나이가 네 살 차이라 옷을 바로 물려주기는 쉽지 않은 터울인데요, 그래도 패딩처럼 값비싼 옷은 두 번 사기 아까우니 잘 보관해 두는 편입니다. 그런데 130 사이즈 패딩은 있는데, 140 사이즈 패딩이 없네요?


 아마 지난겨울에 입던 건 조금 작을 지도 모르는데.

 하나 더 큰 사이즈가 있어야 낙낙하게 입을 텐데.

 큰애가 몇 년 전에 입던 게 있을 텐데...?


 하며 옷장을 한참 뒤지다가, 문득 깨달아버렸습니다. 그 패딩이 더 이상 우리 집에 없다는 사실을요. 3년 전 겨울에 덜컥 기부해 버렸거든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해 겨울에,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스키복에 스키바지를 입고 한밤중에 걸어서 국경을 넘어오는 사진을 봤어요. 국경을 넘지 못한 차들의 행렬이 도로를 막아버리자, 아직 국경까지는 몇십 킬로미터나 남아 있는 상태에서 차를 버리고 걸어왔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 당연히 부피가 크거나 무거운 짐은 가지고 올 수 없었는데, 아이들이 겨울옷이 없어서 곤란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폴란드의 2월은 아직 춥거든요. 급한 대로 난민센터에 있는 겨울옷이나 헌 옷수거함에 있는 옷을 입으려 해도 패딩은 고가의 상품이라 기부된 물품이 잘 없었고, 패딩이 하나뿐이라 부득이하게 빨아야 할 때는 얇은 점퍼 하나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그 소식을 듣고, 큰 애의 작아진 패딩을 덜컥 기부함에 투척했던 게... 3년 전 겨울의 일이네요. 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말이죠. 그때는 140 사이즈 패딩이 다시 필요해질 겨울이 엄청 먼 미래처럼 느껴졌는데.... 허허. 어쩔 수 없이 올해는 새로 패딩을 한 벌 사야겠습니다. 오랜만에 물려받은 옷이 아니라 새 옷을 입게 된 둘째는 신나할 것 같아요.


 사실 그 후에 뒷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요, 우크라이나 난민센터에 봉사하러 갔다가 제가 기부한 패딩의 새로운 주인을 만날 수 있었어요. 굉장히 독특한 패턴이 있는 옷이라 한눈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는데 엄마 손을 잡고 생글생글 웃으며 식료품을 받아가는 그 소녀를 기쁜 마음으로 곁눈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도 어느덧 3년 전의 일이라 그 소녀는 키도 훌쩍 크고 팔도 많이 길어졌을 텐데, 어렵지 않게 새 겨울옷을 구하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140 사이즈의 패딩이 다시 필요해지는 겨울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다시 그 겨울이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대체 전쟁은 언제 끝날까요? 뉴스에서는 북한까지 파병했다는 소식이 연일 보도되고, 사람들은 결국 전쟁의 흥망이 미국 대선 결과에 달려있다고 숙덕거리는데... 여러 정치 뉴스에 가려 전쟁으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의 소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이 길어진 만큼 이제는 난민에 대한 관심도, 경제적 지원도 줄어들어 식료품이나 의복 같은 기초적인 지원조차 어려운 곳들이 늘어났다고 해요. 어른들이야 작년에 입었던 옷을 낡았더라도 다시 입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한 해가 다르게 쑥쑥 클 텐데 말이죠. 부디 먼 곳에 있는 그 아이들이 따뜻한 옷을 어려움 없이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에게 올해 겨울이 너무 추운 겨울이 되진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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