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의 일입니다. 저희 아이들이 2018년부터 다녔던 바르샤바 국제학교에서의 마지막 날이었어요. IB 초등 과정(PYP)의 마지막 수업일에는 국제학교에서도 한국과 비슷하게 '종업식'을 엽니다. 아이들이 5년 넘게 다녔던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 저도 강당 뒤쪽 학부모석에서 종업식에 참석했어요.
지난 1년 간의 추억이 담긴 동영상이 커다란 화면에서 재생되었고, 연이어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 여러분들이 상상하시는 한국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캐주얼한 스피치였지만 - 이 이어졌습니다. 전체 학생들 중 대다수가 외국인인 국제학교의 특성상 (저희 아이들을 포함하여) 부모의 이동수에 따라 올해 폴란드를 떠나는 아이들이 꽤 있었는데, '해외이사'라는 큰 도전과 변화 앞에서 불안할 아이들의 속마음을 보듬는 카운슬링 코너가 길게 이어졌어요. (이것 또한 꽤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따로 글로 풀어낼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올 한 해동안 학교가 무사히 운영될 수 있도록 보태주셨던 분들, 감사했었던 분들께 또한 꽃다발을 드리는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종업식 단상 위로 올라오신 분, 감사 인사를 받는 분들이 제 예상과 조금 달랐습니다. 학교 설비를 봐주시는 관리직 근로자분이 늘 입고 다녔던 베이지색 작업복을 입고 단상 위로 올라오셨어요. 교실 전구가 나가거나, 학교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거나, 화장실 수도 배관이 막히거나 할 때 도움을 주시는 분. 과학실 구석의 깨진 유리조각을 치워주시고, 미술실 벽면에 뭍은 물감을 닦아주시고, 복도 쓰레기통 주변의 여러 얼룩을 닦아주시는 분.
학사일정의 맨 마지막날, 교장선생님이 소감 한 마디 부탁드린다며 마이크를 건네드린 분은 바로 학교 선생님이 아닌 이런 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사히 학교에서 1년을 보낼 수 있었던 숨은 공신,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써주시던 분들 말이죠.
교장 선생님이 한 분 한 분, 학교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써주신 분들을 소개할 때마다 저는 왠지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네, 저는 찐 F입니다...) "너희들은 교실에 있느라 잘 몰랐겠지만 나는 복도에서 늘 부지런히 쓸고 닦으시는 미스터 파베우를 거의 매일 본단다. 그는 항상 바쁘지. 그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어. 우리 학교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단다." 하고 말할 때 저도 아이들과 함께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습니다. 학교 행정실 선생님도 이날의 주인공이었어요. "너희들 중에 학교 방과 후 수업 들어본 적 있는 사람?"하고 교장선생님이 물어보자, 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번쩍 손을 들어 올립니다. 교장선생님은 "너희들이 재미있는 방과 후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건 모두 미쎄스 넬리 덕분이란다." 하며 행정 선생님을 소개하고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넵니다. 세심하게 학교의 모든 스태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분들의 업무가 아이들의 일상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설명해 주시더군요. 일 년에 딱 하루라도 저분들에게 이런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날이 온다면, 나머지 364일 동안 오늘을 추억하며 즐겁게 일하실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이 자리에 있는 학부모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강당의 박수소리가 더 커지도록 힘을 보탰습니다.
문득 제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전체 학생들이 모여있는 종업식에는 어떤 이벤트들이 있었더라?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전국단위 경시대회 같은 외부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한 학생들에게 상장을 증정하는 풍경이었어요. 아니면 학교장상 같은 교내 대회의 시상식. 전체 학생이나 교직원들을 위한 이벤트라기보다는 상장의 주인공인 소수만을 위한 보여주기식 행사였습니다. 연이어 길게 이어지는 교장선생님의 그 훈화 말씀. 따로 선생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던가? 행정 선생님은? 보안관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이나 교감 선생님 외에 단상 위에서 마이크를 잡은 분들이 있었던가? 아무리 과거를 더듬어 봐도, 그랬던 기억은 없습니다.
물론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종업식날, 우리가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 분은 스태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많겠죠. 담임 선생님들도, 교과 선생님들도, 행정실 직원분들도, 매일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보내주신 학부모들도. 그러나 급식실 조리사님, 청소 아주머니, 수위 아저씨... 이런 분들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는 모습은 유독 낯설었습니다. 오늘 같은 종업식이 아니라면 단상에서 스포터라이트를 받을 일이 없는, 평소에 목소리를 들어볼 수 없는 분들이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왜 저는 한국에서 이런 풍경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요?
왜 저는 한국에서 한 번도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까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종업식에서, 이날이 무사히 한 학년을 보냈다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날이라면 이게 더 자연스러운 풍경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아이들의 종업식에는 매년 다채로운 사람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감사 인사를 건네며 방학을 축하하곤 했는데, 한국 학교에 전학 와 보니 교장 선생님만 혼자 무대 위로 올라와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야기를 길게 말씀하시고는 행사가 끝나버린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지기도 했고요. 그날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매년 반복되는 행사였던지라 아이들은 교과나 담임 선생님이 아닌 다른 분들이 단상에 올라온다는 걸 별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 어쩌면 이 종업식이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건 한국 학부모인 저만 그랬던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