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귀국했던 것도 어느새 석 달 전의 일입니다. 첫째가 아기 때 살던 집, 익숙한 모국어, 낯이 익은 이웃들. 그런 정겹고 익숙한 것들에 둘러싸여 폴란드에서 지냈던 날들은 살짝 희미해져가고 있어요. 처음에는 서울 아파트 생활이 낯설어 "폴란드 예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소리쳤던 아이들도 이제는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을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요. 엄연히 이야기하자면 폴란드에서 살던 집은 세 들어 살던 '남의 집', 서울에 있는 아파트야말로 소유자가 부모님인 '우리 집'인데, 아이들은 한동안 "초록집이 진짜 우리 집이다."라고 고집부리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아마 앞으로도 '유년시절에 살던 집'을 떠올리면 서울의 콘크리트 아파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이 초록집을 떠올릴 것 같아요.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그림처럼 예쁜 집. 이 집이 우리 아이들의 유년 시절의 집이 되어주어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바르샤바에서 5년 8개월 동안 살았던 이 집, 초록집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해요. 사실 브런치에 집에 대한 글을 이미 많이 썼던 것 같은데, 써도 써도 이 집에 대해서라면 할 이야기가 자꾸 남아있네요. 사실 폴란드 생활의 8할은 이 집에서 이루어졌으니까요. 집순이의 숙명인가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된, 어마무시하게 큰 단독주택이에요. 2층에는 아름다운 둥근 창문이 있고, 아이들이 괴상한 차림으로 탐험 놀이를 눈치가 보이지 않았던 우리만의 정원이 있었습니다.
이 집을 '초록집'이라고 부르게 된 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락다운 시기부터였습니다. 폴란드의 일반적인 주택들은 하얀 벽에 붉은 기와지붕을 가지고 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저희 집은 상큼한 민트그린 색깔의 벽을 가지고 있었어요. 단순히 집주인의 취향 때문이었을까요? 60년이나 된 집이라고 하니 흰 벽이 너무 지겨웠을지도 모르고요. 덕분에 골목 끝에서도 초록초록한 저희 집은 눈에 딱 띄었는데요, 한 번 저희 집에 놀러 왔던 지인들은 자세한 주소를 기억하지 못해도 근방까지만 오면 쉽게 저희 집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얀 비둘기들 사이에 초록색 비둘기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그런 우리 집에게 '초록집'이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한 건 바로 2020년, 초록집 유치원 개원식(?) 이후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락다운이 시행되자 아이들의 어린이집은 언제 다시 연다는 기약도 없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말았어요. 그 막막했던 2020년 3월, 저는 그 후로 약 10개월 동안 아이들의 엄마이자 아이들의 유치원 선생님으로 투잡을 뛰었습니다. 학생은 5살 둘째와 3살 막내, 단 두 명. 수업시간은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아직 폴란드에 산 지 1년밖에 되지 않아서 친구도 별로 없고, 모든 게 낯설기만 했던 시기인데, 무기력하게 집에 틀여 박혀서 텔레비전만 틀어주는 엄마가 되지 말자고 시작한 반강제 홈스쿨링이었어요. 그때 초록집 유치원이라는 예쁜 이름도 지어주고, 매일 시간표에 따라 수업했어요. 모든 활동 사진을 찍고, 매주 수업 계획을 짜고, 밤에는 홈스쿨링 일지를 썼습니다.
이 시기에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에 사는 이점을 듬뿍 누렸어요. 약 반년 동안 다섯 식구가 시장 볼 때를 제외하고는 대문 밖을 나가지 않는 극한 집콕생활을 했었는데, (모두 다 문 닫아서 갈 데도 없었어요...) 괴롭다거나 지루하다거나 갑갑하다는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 초록집에 여름정원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코로나 기간 동안엔 정원사 아저씨도, 가사도우미도 오지 않아 몇백 평이나 되는 공간을 오롯이 우리끼리만 관리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손님도 방문객도 없으니 그저 우리 가족의 편의에 맞춰 여력이 되는 만큼만 대충 관리하며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아이들이 그때 잔디도 많이 뽑아가며 소꿉놀이도 하고 여기저기 삽으로 두더지처럼 구멍도 파곤 했는데... 그 뒤처리는 다 제 몫이었지만요.
언젠가는 정원에 대한 글을 꼭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 즈음이에요.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카렐 차페크의 문장을 비로소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초록집 정원 덕분입니다. (전혀 손바닥 사이즈가 아니어서 좀 많이 힘들었지만요...) 저의 작업실이자, 휴식 공간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아름다운 초록집 정원은 이제 과거의 공간이 되어 버렸지만 한평생 살면서 '내 정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치스러운 공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경험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에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건 폴란드에 살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이점이었다고 생각했고, 타지에서 팬데믹 기간을 보내는 동안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이 집과 이 정원 덕분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만약 바르샤바에서도 아파트에 살았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마음을 다잡았을까요.
주재 생활이 길었던 만큼 중간에 한 번 집을 옮길 만도 한데, 저희는 5년 8개월의 주재 생활 동안 쭉 이 집에서만 살았습니다. 한집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 집은 제가 가정을 꾸린 이후에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이 되어 있었어요. 그만큼 정도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함께 했던 시간이 길어야만 느낄 수 있는 '정'이 있겠지만, 공간에도 시간이 축적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애잔한 마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아이들 놀이방 한편에는 5년 전부터 아이들 키를 쟀던 벽이 있습니다. 80센티부터 160센티까지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아이들의 키재기 흔적. 이 흔적이 너무 아쉬워서 이걸 어떻게 하나, 기둥째 뽑아올 수도 없고... 하다가 아쉬운 대로 사진만 찍어 왔는데요, 가끔 이 오돌토돌한 벽을 만지면서 아이들의 성장을 느끼곤 했던 그 시간이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서울 아파트에도 책장 한편에 키재기 스티커를 붙여놨는데, 아직 정이 안 들어서 그런가 어색하고 남의 집 살림 같기만 해요. 우리 아이들 셋 다 건강하게 자란 집은 초록집이었는데, 그곳에 그 기록과 역사가 다 있는데. 지금쯤은 하얀 페인트에 뒤덮여 흔적도 없이 다 사라졌겠죠?
이 사진의 제목은 저의 '눈물 버튼'이라고 해야겠어요....
이 집을 떠나오는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삿짐을 다 보내고, 몇 달 동안의 살림살이만 챙겨 시내 호텔로 옮겨가는데, 조수석에 앉은 저는 목이 매여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한참 침묵하다가 벌게진 눈으로 뒷좌석의 아이들을 돌아보는데, 엄마아빠 눈치를 보는 건지, 아니면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리면 더 마음이 힘들 것 같아서 그랬는지, 모두들 숨죽이고 우는 모습을 보니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이삿날 바로 다음날이 토요일이라 한글학교에 출근하러 시내 호텔에서 살던 동네로 다시 차를 내려오는데, (한글학교에서 길만 하나 건너면 바로 초록집이 있었거든요.) 익숙한 거리와 풍경이 가까워질수록 다시 눈물이 차오르지 뭐예요. 출근길인데! 수업해야 하는데! 교단에 서서 애들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울음을 멈춰 보려고 애쓰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결국은 벌게진 눈으로, 마지막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구글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켜면, '집'이라는 버튼이 아직 폴란드 바르샤바로 설정되어 있어요. 그리고 내 몸은 아주 멀리 있어서 '집' 버튼을 클릭해도 집까지 가는 경로를 찾아줄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는 초록집도, 바르샤바도 떠나온 공간이니 '내 집', '내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데, 아직도 꿈을 꾸면 그곳을 무대로 제 일상이 펼쳐질 때가 있어요. 계단을 오르락 내리는 아이들 발소리, 봄이면 마당에 가득했던 라일락꽃 향기,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었던 가을 낙엽들, 그리고 손때 뭍은 부엌. 폴란드에서 지냈던 날들은 살짝 희미해져가고 있지만, 어떤 기억들은 오히려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아마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낄 때마다 저는 초록집 정원에서 느꼈던 계절을 떠올리게 될 거고, 겨울 끝자락의 스노드롭을 그리워하고, 벽난로의 장작 타는 냄새를 그리워하게 될 것 같아요.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서 바르샤바에 간다면, 그래서 다시 초록집이 있던 그 골목에 간다면 저는 울지 않고 '우리 집'을 마주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