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나오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동물의 털같이 보드라운 눈송이가 바람결에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 아파트 단지를 나가, 대로를 건너, 거리 공원을 건너,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동안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 커다란 눈송이들이 두 아이의 머리와 어깨와 가방에 소복이 쌓였다.
조남주, <귤의 맛> 51쪽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온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었다. 아침 일기를 쓰며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 소식을 알려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막내아들이 눈을 비비며 잠이 덜 깬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그대로 방문 앞에서 아이를 덥석 안아 올려 창가로 데리고 갔다. 엄마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비몽사몽 간에 있던 아들은 새하얀 바깥 풍경을 보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다. 우와, 하는 탄성과 함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눈이 내린 풍경보다도, 그 풍경을 보고 즐거워하는 아이 얼굴을 보는 게 더 행복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너무 행복해서, 행복해하는 아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아이의 통통하고 보드라운 볼에 쪽, 뽀뽀를 했다.
집에서 1시간 반 거리의 다른 도시로 출근하는 남편은 이른 아침부터 출근길을 걱정하더니, 출근해서는 다시 퇴근길을 걱정한다. 항공사에 근무하는 대학 선배는 연이은 항공편 지연 안내 화면을 캡처해서 자신의 SNS에 올리고는 '하늘에서 쓰레기가 내린다'라고 덧붙였다. 6년 동안 주택에서 살다가 올해 아파트로 이사 온 나는 '아, 이젠 마당이 없으니까 더 이상 눈 안 치워도 되네?' 하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갑자기 마음이 즐거워졌다. 아이들은 "밤새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렸습니다. 오늘 일과 중 잠시 시간 내어 운동장에서 눈놀이를 하겠습니다."라는 담임 선생님의 알림장을 확인하고 환호하며 등교했다. 첫눈을 맞이하는 아이들의 순전하고 아름다운 기쁨을 보면 좀 부러운 마음이 든다.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
눈이 내리는 날. 사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생일날 눈이 내리면 잘 산다던데.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피잣집에서 같은 반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고 나오는데 그날 오후에도 오늘처럼 첫눈이 내렸다. 친구들 중 누군가가 "생일날 눈이 내리면 한 해동안 행운이 가득하대! 축하해!" 하고 환호했다. 친구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내 생일날 찾아온 행운의 첫눈을 나보다도 더 순수하게 기뻐해줬던 그 친구의 목소리만은 아직도 선명하다.
과연 올 한 해에 행운이 찾아올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내게 찾아온 행운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눈치채지도 못할 것 같지만, 하얗게 덮인 세상을 보니 왠지 위로받는 느낌이다. 생일날 내리는 눈은 지난 한 해 동안의 후회나 자책 같은 것들을 새하얗게 덮어주는 느낌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아니고 화이트 벌스데이에, 남편은 지금 내리는 눈도 하늘에서 주는 선물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하느님이 과연 하늘에서 눈구름을 부리며 내 선물을 소복소복 내려주시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하얀 눈송이 덕분에 올해 생일에는 평소보다도 더 선물을 수북이 받은 느낌인 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