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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Nov 25. 2024

유리병을 깨뜨린 기억

<다정한 구원>에서 만난 문장


티테이블 위에는 하얀색 도자기로 만든 전기 찻주전자와 생수가 담긴 사각형 유리병이 올려져 있는데, 높은 천장과 화장실 변기 옆의 수동식 비데보다 나는 호텔의 이 유리병을 보며 유럽에 와 있다는 실감을 가장 강하게 느낀다. 유리가 꽤 두껍다 보니 한 손으로 들고 물을 따르기에는 어처구니없이 무겁다. 하지만 플라스틱 재질의 물건을 사용하지 않는 이런 자세는 실리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유럽의 긍지를 보여준다.

임경선, <다정한 구원> 134쪽


 아주 어렸을 적 추억의 물건을 떠올리자면 '델몬트 오렌지주스 유리병'이 생각난다. 옆으로 길쭉한, 타원과 직사각형의 중간쯤 되는 바닥면을 가지고 있는 이 넓적한 유리병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 어느 가정집에서나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집 냉장고에는 늘 이 유리병에 담긴 시원한 보리차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오렌지주스를 유리병에 담아 팔지 않는다. 과일주스는 이제 가벼운 종이팩이나 페트병에 담겨 있고, 그건 우유도 마찬가지. 하지만 폴란드에 살 때는 유리병에 담긴 우유가 아주 흔했는데, 특히 일반우유보다 가격이 30퍼센트 정도 비싼 유기농 우유는 어김없이 레트로풍의 예쁘고 귀여운 체크무늬 뚜껑이 달린 유리 우유병에 담겨 있었다. 막내아들은 그 우유를 '목장우유'라 부르며 마트에 함께 장을 보러 갈 때마다 꼭 목장우유를 사달라고 졸랐다.


 사실 어린 시절 '델몬트 오렌지주스'에는 친정엄마에게 전해 들은 가슴 아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내가 천지분간하지 못하던 시절의 일이라 하니 아마 80년대 말쯤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우리 집에 막 배달 온 오렌지 주스병을 잠깐 식탁 위에 놓고 현관에 돈을 지불하러 간 사이에, 그 새를 못 참고 빨리 오렌지주스를 먹고 싶어 했던 어린 내가 유리병을 건드리고 말았고... 그 바람에 식탁 위에 있던 주스병은 그대로 바닥으로 낙하하여 와장창 깨져버렸단다. 그때만 해도 우리 집 살림에 오렌지주스는 선뜻 사기 힘든 가격의 나름 사치품이었는데,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고 먹을 수 없게 된 오렌지주스와 난장판이 된 부엌 바닥을 바라보며,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30대의 우리 엄마는 그만 왈칵 울음이 터져버렸다고 한다. 사고를 친 당사자인 나는 정작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의 일이다.


 막내아들이 22개월이었을 때부터 6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유럽에 살며 셀 수도 없이 많게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사 먹었지만 유리병을 깨뜨린 기억은 없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세 아이들이 한 번쯤은 사고를 칠 법도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아이들이 나를 힘들게 할 때가 있다. 얘네들이 엄마 괴로우라고 나한테 일부러 이러나 싶게 한계까지 치달아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날이 온다. 그런 날이면 삼십 몇 년 전 내가 깨뜨린 유리 주스병을 떠올려본다. 그러면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이렇게 되뇔 수 있다.


 그래도 너희들이 나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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