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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일상의 글쓰기

<이국에서>에서 만난 문장

by 주정현 Feb 28. 2025


 그나마 초기에는 비교적 자주 길게 글을 썼지만, 나중에는 간격이 벌어지고 짧아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쓰지 않았다. 그것은 그 도시에서의 정착의 여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삶이 불안정할 때 삶의 불안정함을 토로하는 글은 길고 글쓰기는 잦다. 삶이 안정할 때 삶의 안정함을 토로하는 글은 짧고 글쓰기는 드문드문하다.

이승우, <이국에서> 56쪽


 마음속에서 글감이 차오르던 시기는 단연 폴란드 정착 초기였다. 외로웠고, 불안했고, 삶이 버거웠다. 그 감정들은 기복 없이, 일정한 무게로 매일을 짓눌렀다. 낯선 언어와 낯선 문화, 어쩌면 그보다 더 낯설었던 건 그곳에서의 ‘나’였다. 익숙한 배경 속에서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아도 되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선 곳에서는 나조차 낯설어진다. 그래서 그 시기에는 말이든 글이든 무언가를 계속 쏟아내야만 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무질서하고 거친 언어로.


 그때는 브런치 계정을 만들기 전이라, 대학생 때부터 운영하던 개인 블로그에 이런저런 하소연을 쏟아내곤 했었다. 특별한 정보를 주기 위한 글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쌓여 있는 감정을 덜어내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보다 바르샤바에 조금 늦게 정착한 몇몇 교민 언니들이 내 글을 검색해 읽어본 적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해외 이사를 준비하며 ‘이곳에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며 '폴란드', '바르샤바' 같은 키워드로 내 글을 찾아보게 되었고, 내 글을 통해 "해외 생활이 이렇게 우울하고, 버겁고, 힘든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그 시기 내 글은 누군가에겐 하나의 예고편 같은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요즘은 놀랍도록 평온하다. 아니, 평온을 넘어 무기력에 가까운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로 돌아와, 첫아이를 키우고 막내를 낳았던 그 아파트에서 다시 살고 있다. 창문을 열면 예전과 같은 거리 풍경이 보이고,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생활 패턴을 반복하며 하루가 지나간다. 해외에서 오래 머물다 돌아온 사람들이 겪는다는 ‘역문화 충격’ 같은 것이 나에게도 올 줄 알았는데, 그런 불편함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버려서 스스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어제도, 작년에도, 쭉 여기에서 살았던 것만 같다.


 어쩌면 지난 몇 년간 나는 너무 긴장하며 살아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공항에서 내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국이라는 모국, 그리고 한국어라는 모국어가 주는 익숙함과 안정감은 생각보다 더 강력했다. 가정에서의 언어와 사회에서의 언어가 동일해졌다. 매일 수십 번씩 클릭하던 번역기 어플리케이션을 홈 화면에서 삭제했다. 일상적으로 쓰이던 언어 속에서 나를 설명하는 수고로움이 사라졌고, 무언가를 새롭게 배워야 한다는 부담도 덜어졌다. 시간은 부드럽게 흘러갔고, 감정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평온한 마음의 반대급부도 존재한다. 마음속에 응축되던 감정이 적어지니, 그 감정을 풀어놓을 글감도 함께 줄어들었다. 그래서인지 예전처럼 글이 술술 써지지 않는다. 마치 바닥까지 퍼내고 난 우물처럼, 이제는 더 이상 퍼낼 것이 없어진 기분이다. 이런 상태에서도 여전히 글을 써야 하는 걸까? 아니면 한동안은 이 평온을 있는 그대로 누려야 하는 걸까? 어떤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요즘은 그 질문을 곱씹으일상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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