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시칠리아 여행기,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다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을 만났다.
시칠리아의 와인은 싸고 훌륭하다. 대체로 5유로에서 7유로 사이의 와인들을 사다가 식사에 곁들여 먹었다. 술은 가능하면 언제나 그 지역의 것을 먹는다는 게 내 원칙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라는 책에서 하루키는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는 더 멋진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 자국에서 생산된 가장 좋은 술은 자국에서만 소비될 것이다. 내가 먹기만도 아까운데 어디 다른 사람들에게 이 귀한 술을. 그런 의미에서 폴란드의 맥주는 여행하지 않는다. 독일, 벨기에, 체코 맥주가 버글버글한 한국 슈퍼마켓에서 폴란드 맥주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한국시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서 너무 생소하겠지만, 사실 폴란드는 독일, 영국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가장 많은 맥주를 생산하는 맥주대생산국이다. 이는 유럽연합에서 네 번째로 큰 농지 면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농식품을 생산하는 농업강국 폴란드의 역량에서 기인한다. 술을 빚는 재료가 되는 곡물생산만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폴란드는 독일과 프랑스에 이어 유럽연합에서 세 번째로 큰 곡물 생산국이다. 거기에 긴 겨울과 추운 날씨, 그리고 대대로 술을 좋아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를 생각하면? 맥주가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사실 대외적으로 맥주보다 더 유명한 폴란드의 술은 보드카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폴란드는 보드카의 발상지이다. 보드카의 최대 생산국인 러시아를 그 발상지로 보는 의견도 있으나,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 나라가 독일과 러시아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시각각 국경선이 변하는 동안 15세기 즈음 이 땅 어딘가에서 이곳의 넓은 농지와 풍부한 농작물을 바탕으로 보드카가 처음으로 탄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한국 여행객들이 귀국행 비행기에 이곳의 보드카를 선물용으로 사 가곤 한다.
그렇다면 맥주는? 아무래도 맥주는 선물용으로 약하다. 웬만해선 일반 소비자에 의해 국경선을 넘지 않는다. 그렇지만 수입업자에 의해서도 폴란드 맥주는 국경을 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여기서 힘을 얻는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폴란드는 유럽 내에서 세 번째로 많은 맥주를 생산하지만 수출량으로 통계를 내 보면 15위쯤, 저 멀리 순위권 밖으로 내던져진다. 약 90%의 맥주가 자국 내에서 소비된다. 통계적으로 폴란드 국민 1인당 1년에 약 92리터의 맥주를 마신다고 하는데, 이것은 체코와 독일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양이다. 물론 폴란드 사람들이 맥주만 마시는 게 아니라 보드카도 마시고, 와인도 마시고, 사과주도 마시고(사과는 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중국 다음으로 세계 2위라고...;;;), 술이란 술은 다 섭렵하는 가운데 나오는 통계적인 수치다. 열심히 많이 만들어서 우리끼리 마시는, 그것이 바로 폴란드 맥주다.
그래서 처음 폴란드로 이사 왔을 때, 너무 놀랍도록 맛있는 폴란드 맥주 맛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슈퍼마켓에 있는 폴란드 자국 브랜드의 맥주를 하나하나 도장깨기 하듯이 (거의 모두) 마셔봤다. 가장 유명한 브랜드인 Zywiec(즈비에츠), Tyskie(틔스키에), Okocim(오코침), 그리고 książęce(크시옹젱체) 중에서 내 마음에 가장 쏙 든 것은 Zywiec(즈비에츠). 그중에서도 밀맥주인 białe(비아웨. white/wheat beer)를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무알콜 맥주'의 맛이다.
알콜이 없는 맥주를 왜 마셔?라고 물어보겠지만 때때로 마셔야 할 일이 있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폴란드에서 내가 운전을 담당했을 때, 혹은 대낮이라 아직 나를 기다리는 수많은 업무를 염려하며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될 때, 혹은 약을 먹었기 때문에 간과 위를 쉬어줘야 할 때. 그럴 때면 그냥 맥주를 마시지 않는 게 낫겠지만, 일반 맥주 맛과 똑같은 혹은 오히려 더 맛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부드러운 크림맥주가 눈앞에 있다면 마시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일반 라거, 밀맥주, IPA 등등 다양한 변주의 무알콜 맥주가 기다리고 있다면 또한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향과 맛이 일반 맥주와 똑같은 끝내주게 맛있는 무알콜 맥주를 마실 때마다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다. 내가 이 맥주를 진작에 만났더라면, 나의 과거가 그렇게 참혹하지는 않았을 텐데.
삼 남매의 엄마인 나는 임신기간 30개월, 수유기간 30개월의 총 60개월의 무알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무려 5년의 기간 동안 술을 마실 수 없는 몸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무알콜 맥주와 무알콜 와인은 모두 마셔본 것 같다. 심지어 파리바케트에서 파는 달달한 탄산음료인 '무늬만 샴페인'까지. 평소에 엄청 술을 좋아하는 술꾼은 아니지만, 지친 육아 중에 만나는 달콤한 휴식 속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당기는 순간은 엄청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맛없는 탄산 보리음료인 무알콜 맥주로 달랬던 순간들. 니맛도내맛도 아닌 밍밍했던 그 맥주들에게 폴란드 맥주를 들이대고 싶다. 제발, 이렇게 좀 만들어달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임신과 수유 중에 시원한 맥주를 아쉬워하고 있을 친구들이 떠오른다. 할 수만 있다면 고국의 친구들에게 이 무알콜 맥주를 궤짝으로 사다가 보내고 싶다. 물론 남편들에게는 알콜도 풍미도 풍부한 일반 맥주까지 더해서. 한국에 있는 초보 엄마들을 위해서 폴란드 맥주를 여행시키고 싶은 이 간절한 마음을 알까. 제발 맥주 수입업자들이 이 글을 보고 선박에 폴란드 맥주들을 가득가득 담아 인도양을 건너 줬으면. 그렇다면 귀국 후에도 내가 폴란드 맥주들을 마음껏 맛볼 수 있을 텐데.
단돈 900원의 행복. 코로나로 여행하지 못하는 내 곁에, 너무 사랑받아 여행하지 못하는 폴란드 맥주가 있다. 그래, 올여름에는 그냥 너와 함께 스트레스를 날려버려야겠다. 대신 뱃살은 조금만 늘어나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도 살짝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