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진실을 말할 때 용기 낼 필요가 없는 세상이어야 했다.
아동학대 사건은 가정 내에서 은밀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사건의 증거나 목격자 진술을 찾기 어렵다. 더구나 피해 아동이 사망했다면 가해자는 얼마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으로 법망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처음엔 준이 아빠가 부탁한 탄원서를 써주지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는 나 말고도 여기저기 탄원서 부탁을 하겠지만 아이가 죽은 마당에 누가 탄원까지 하며 그들을 돕겠는가 생각했다. 더구나 준이가 목숨을 잃으며 작은 몸 수십 군데에 증거를 남겨 두지 않았던가?
'당연한 상식'이라고 믿던 것이 타인에 의해 '부정' 당할 때 큰 벽을 마주하게 된다. 길이라고 믿고 걷던 곳이 순간 사라져 버린 느낌말이다. 내 예상은 틀렸고 순진하기만 한 예측이었다. 주변에는 그가 원하는 탄원서를 써준 이들이 꽤 있었다.
아이의 '죽음'으로도 바뀔 게 없다는 현실에 가슴이 답답할 즈음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불구속 수사로 전환되며 가해자가 석방됐다. 그녀는 자신이 돌아온 것이 당연한 일인 듯 이곳저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혐의가 확정될 때까지 무엇도 단정하면 안 됐지만 아무 일 없는 듯 활짝 웃는 그녀 모습에는 얼마 전 아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마주친 이들의 태도를 지켜보며 과연 타인의 겉모습만 보고 섣불리 '우리'라 칭하며 같이 웃고 지내도 되는 걸까? 회의감 마저 들었다.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 없는 현실이 막막하기만 했다.
상황이 반전을 맞은 건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준이 부검에 참여했던 부검의들이 한 목소리로 내놓은 말이었다. 불충분한 증거를 보강하기 위한 경찰의 탐문수사가 벌어지고 의혹을 풀기 위한 방송국 취재가 이어졌다. 나도 인터뷰에 응했다. 준이를 치료했거나 검안하고 부검했던 의사 13명이 모두 증인출석 의사를 밝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가해자는 다시 구속됐다.
조금이나마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지만,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축소하려는 아이 아빠와 다른 가족의 끈질긴 탄원요청이 가해자 형량을 줄이는데 결국 영향을 미쳤다. 이 사실은 떠난 준이에게 다시 한번 아픈 상처를 남기게 됐다
운명 당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숙명' 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울지도 못하던 아이를 눈앞에서 놓치고 그 일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선명하게 제시한 것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여기게 됐다. '낳은 이에게 부정당한 벌'을 견디는 시간은 쉽지 않았지만 그저 헛것은 아니었을 거라 믿는다. 크게 용기 낼 필요 없이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린 조금 더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