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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ul 25. 2023

지금은 부모가 달라질 때

에필로그

최후의 방어선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교육이라는 말로 포장됐던 둑이 터졌다. 한 젊은 초임교사로 부터 신호탄이 터졌고, 이제 좀 더 솔직해지라는 명징한 메시지가 전해졌다.


우리나라 교육계는 현재 대 변화의 중심에 있다. 교사를 상대로한 학부모의 갑질이 사회문제로 대두 됐다. 집단 우울이 걱정될 만큼 사나운 뉴스가 이어진 날들이었다. 폭염 속 길 위에 하얀 국화가 끝없이 쌓여가고 우린 그 여름 어디쯤에서 곡소리를 멈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냉정함을 잃으면 시야는 좁아진다. 사안이 심각하고 의지가 결연한 만큼 논점을 흐리지 않아야 했다. 저울은 수평을 맞춰야 하고, 함부로 총구를 겨누거나 활시위를 당기지 않을 일이었다. 학생이 교사를 구타하고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교사가 교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한 동네 소아과는 맘카페를 통한 환아 보호자의 악성 리뷰로 폐원을 결정했다. 어디부터 손봐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안개속 같은 날들이었다.


우린 무엇도 섣불리 일반화할 수 없다. 교사도 모두 같은 교사가 아니었고, 학부모도 모두 같지 않다. 아이들 역시 모두다르다. 특히 '충동 조절 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 역시, 사회의 관심 속에 적절한 시기에 충분한 치료를 받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충동 조절 장애'가 명백히 치료해야 할 병적 문제임에도 부모가 방치하고 교사는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치료 시기를 놓치며 아이들이 병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확실한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는 부모 밖에 없다. 부모는 아이에 대해 법적, 정서적 의무와 권리를 모두 갖고 있는 유일한 존재기 때문이다.   


건물도 갑자기 붕괴되지 않았다. 크고 작은 전조 증상이 있은 후에 끝내 붕괴했다. 어떤 문제도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회가 '인간의 서사'를 읽으려 하지 않고는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였다.


궁금하지 않은가? 왜, 갈수록 '충동조절 장애'를 앓는 아이들이 늘어만 가는 건지. 왜, 청년이 된 아이는 타인의 불행을 바라며 백주대낮에 칼을 휘둘러 타인은 물론, 스스로 자멸의 길로 들어섰는지 말이다. 아직은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 이제라도 내 아이는 물론 이웃의 아이도 살펴볼 일이다. 왜냐하면,

'내 아이와 이웃의 아이는 미래의 어느 골목에서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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