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더 이상 상처받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상처란 의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잊을 방법이 없다면 상처를 통해 우리가 성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름 방학을 시작할 즈음 수면 위로 올라온 교육 현장 문제는 모두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냈다. 이제 개학을 하고 다시 일상을 준비하지만, 모두의 마음이 이전으로 돌아가긴 어렵게 됐다. 어디서든 각자 입장에 따른 하소연과 분노 섞인 글을 볼 수 있었다. 그중 어떤 교사가 남긴 글을 보고 결국 이 글을 쓰게 됐다. 제목은 '교사가 학부모에게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수칙'이었다. 요약해 보면 내용은 이랬다.
교사는 학부모에게,
웃지 말 것, 연락하지 말 것, 친절하지 말 것, 아이관련한 것 외에 대화하지 말 것, 죄책감을 갖지 말 것, 사과하지 말 것, 상담하지 말 것(개인적인 얘기 들어주지 말 것) 잘하려 하지 말 것, 학부모 말에 실망하거나 그들이 바뀔 거라는 기대를 하지 말 것
물론, 앞에 (과도하게)라는 단서가 있긴 했다. 다만 '과도하다'는 표현은 기준부터 애매하니 단서가 되긴 어려웠다.
우선 왜 이런 수칙까지 생겼을지 너무나 이해가 됐다. 요즘 매스컴에는 악성 민원인으로 둔갑한 학부모의 악행이 끝도 없이 쏟아지다 못해, 우리가 '왕의 DNA'라는 듣도 보도 못한신조어까지 알게 됐으니까. 하지만 교사의 이런 방어전략은 대안이 될 수 없어 아쉽다.
이번에 여실히 드러난 것처럼, 교사가 언제까지 천차만별인 학부모 개개인과 싸울 수 없다. 바뀌고 보완될 것은 세부적으로 촘촘한 제도와 시스템이지, 다수의 일반적인 학부모까지 적으로 간주되선 안된다. 교사와 부모가 대화하지 않고, 웃어서도 안되며 친절해서도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과연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가 로봇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나라 교육의 역사는 짧고, 군사정권 시절 학교 현장은 전체주의를 강조한 군대식 단체기합과 폭력이 난무했었다. 나 역시 단체기합으로 따귀를 맞고도 머리 숙여 공손히 인사했던 여중생 세대를 지나왔다. 그뿐인가? 교사가 당연하게 촌지를 요구하고 노골적으로 아이를 차별하던 시절이었다. 그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들이 이제 교사도 됐고 학부모도 됐다.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예견됐던 문제가 터지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가 없을 때, 교사도 학부모도 없다.
우리나라 교육 역사에 '어린이'가 존중받은 적이 과연 있었던가? 과거엔 폭력 교사가 있었다면 지금은 아이를 볼모 삼은 부모가 있는 셈이다. 그 사이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일반적인 교육을 받아야 할 어린이들이다.
어떤 세대에도 문제는 있었다. 과거 학교는 빈부 격차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던 곳이었다. 경쟁이 부추겨진 시대가 사교육으로 아이들을 내몬 탓에, 학교가 본래 기능을 잃고 '보육'의 개념이나 '입시기관'으로 변질되면서 여러 문제가 생겼다.
교사도 상처를 통해 성장해야 한다. 교사의 자부심을 찾고 더욱 굳건해져야 한다. 그것은 학교가 교육의 최전선이란 사실이 변할 수 없고 여전히 '학교'가 필요한 어린이가 있기 때문이다. 양육자 역시 진심으로 내 아이가 학교에서 서로 어울려 행복하길 바란다면 아이를 바르게 키우기를 고민하는 다수가 뭉치면 된다. 상식선을 넘은 일부 학부모의 횡포가 다수 어린이의 수업권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목소리는 들을 수 없어 아쉽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민폐 족으로 전락하고, 사회가 어린이를 냉소 섞인 시선으로 보는 것을 넘어 혐오의 대상으로 폄훼하는 현실을 목도할 때마다 막막해진다.
'학생 인권 조례'가 원흉이니 폐지해야 한다는 이도 있고, 심지어 군사정권 때 일반인은 물론 소위 '문제아'라 불리던 학생도 끌려갔다는 '삼청교육대'가 부활 돼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조례를 악용하는 폐해를 막기 위해 내용을 수정 보완 해야겠지만 '학생 인권을 보호할 제도'까지 막으라는 말은 참 슬프다. 학생뿐 아니라 누구의 권리도 지켜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과거에 매 맞고 억압 속에 자란 기성세대가 달라진 세상에 대고, '너희는 매를 맞지 않아서 버릇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허탈한 일이 또 있을까? 약자로 살아 낸 경험이 고작 남긴 것이 다른 약자를 억압하는 일이라면 과연 우리에게 미래가 있긴 한 걸까? 이젠, 옳고 그름의 잣대보다 각자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