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오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본 적 있지만, 기사에서 본 '맹렬히 달리는 소' 사진 한 장에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소는 오랜 세월, 인간에 의해 '도축용 가축'이라 분류됐고, 기사 본문에도 '육우용 한우' 1마리가 도축장에서 탈출했다고 적혀있었다.
정작 나조차 점점 고기를 덜 먹으려 노력할 뿐, 앞으로 비건이 되겠다는 식의 다짐 앞에선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다만, 이 사진 한 장이 마음에 얹히듯 남은 이유는 우리가 '육우용 한우'라고 부르고, 애초에 도축할 것을 목적으로 키워진 이 소에게 '마음'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달려 봤을 소가 결국 다시 도축장으로 실려갔고, 인간의 식탁에 오를 예정이거나 이미 올랐을지 모른다. 그것이 저 소가 가진 '운명' 일 테니까 말이다.
'살고 싶소' '살고 싶었소'
이 기사에 대해 여러 신문이 서로 사이좋게 나눠 뽑은 제목은 토씨하나 바꾼 정도로 비슷했다. 한 생명이 도살당하기 직전 탈출을 시도해 왕복 7차로를 내달렸지만 결국 소에겐 어떤 드라마도 생기지 않았고, 더 이상 저항 없이 인간에 의해 도축작업장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기엔,
기사 제목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울 뿐 아니라, 비정하다. 세상엔 당연히 죽어야 할 생명이 있는 것 아니냐며, 도주에 실패한 소의 헛된 일탈을 조롱하자며 부추긴다. 살고 싶소! 살고 싶었소!
인간에겐 언제나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이러고도 오늘 당장 소의 '맛있는 부위'를 운운하며 식탁에 올리고 살게 될지 모른다. 그 또한 인간의 선택일 것이다. 인간이 그들과 같은 '동물'이면서도 차이를 뒀던 이유가 단지 이성을 가진 때문이라면, 우린 좀 더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
'선택지 없이' 죽는 생명에 대해
'작은 예의'는 지키고 사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