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돌보는 맛
따뜻한 남쪽 끝 제주에도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든다. 다른 일일랑 아무것도 하지 말고 종일 글만 쓰라 해도 불평 없이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기대와 달리 나에겐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보통은 주말을 쉬고 월요일을 맞이 하지만 금요일부터 바쁘기 시작하는 내 일정은 수업이 가장 많은 주말을 통과해 수요일까지 바쁘다. 몇 년을 고수했던 '주말 수업 불가' 방침은 시내로 나오고 얼마 못 가 철회했다. 주중에 바쁜 요즘 아이들 일정에 맞춰 주말을 반납했고 대신 쉬는 목요일을 기다리게 됐다. 주중에도 하루에 두세 개 팀 수업이 있지만 모든 일이 집에서 이뤄지는 만큼 틈틈이 내 아이들을 챙기고 살림을 병행할 수 있음에 대한 ‘감사함'과 진득이 앉아 글을 좀 쓰고 싶은 ‘욕망’이 혼재된 일상이 이어졌다.
캐나다 변호사 연수과정에 참여 중인 큰 딸이 숙소를 구해 나간 지 어느새 한 달이 다 됐다. 본격적인 연수 일정이 시작된 주중에는 연락이 뚝 끊기는 것만 봐도 정신없이 바쁜 게 고스란히 전해져서 주중에는 각자 조용히 지냈다. 딸이 주말에 쉬는 만큼 내 주말 일정이 마무리되면 딸이 좋아하는 반찬 몇 가지를 들고 딸에게 가는데 그 마음이 참 묘했다. 사춘기 때부터 떨어져 지낸 탓에 항상 멀리서 말로만 걱정했던 무력한 시간의 기억이 먼저 스치고, 시집간 딸 집을 방문하는 마음도 이와 비슷할까 상상했다.
큰 딸은 어릴 때부터 입이 짧고 뱃구레가 작은 아이였다. 비위가 약해서 겨우 먹인 밥을 결국 뱉어내곤 했었다. 육아전선의 엄마 입장에서 보면 ‘최상위 난이도의 강적’ 아기였다. 요즘처럼 이유식 정보도 많지 않을 때에 혼자 이 궁리 저 궁리로 겨우 만든 이유식을 떠 먹일 때면 아이가 꿀꺽 삼켜 줄지, 아니면 다시 뱉어 버릴지 항상 조마조마했었다. 그런 딸이 성인이 되어 이제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때론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딸이 지내는 숙소가 바닷가 가까이에 있기도 해서 딸을 만나러 가는 주말 나들이는 나에게도 힐링이었다. 딸은 여러 상황과 취향을 고려한 정성스러운 맛집을 찾아 뒀다 나를 데려갔다. 맛있는 한 끼를 즐겁게 먹고 바다를 앞에 두고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깔깔대기 바빴다.
주로 일주일을 지내는 동안 각자 느낀 생각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평소 우리 대화에 장르는 최근 이슈에 대한 생각이나 듣고 있는 팟캐스트에서 얻은 지혜나 살고, 죽는 철학적 이야기는 물론 각자 달라진 생각의 변화에 대해 서로 의견을 냈다. 그 외에도 눈빛만으로 알아채는 우리식 농담까지 보태지면 대화는 종횡무진 이어졌다고 그쯤 되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란 얼마나 편하고 좋은 것인가 생각하게 됐다. 사실 전해 줄 반찬이나 딸이 데려간 맛집도 핑계였고 일주일 동안 쌓인 얘기를 나누는 게 우리에겐 더 중요했었다.
지난 일요일은 그마저 가보지 못했다. 일도 글도 밀려 있었지만 피곤했는지 몸이 무거웠다. 종일 일 하나 하고 한숨 자고, 다시 일하나 해놓고 한숨 자기를 반복했더니 피로는 한결 풀렸지만 딸을 보러 가지 못한 마음은 무거웠다. 다시 한 달 뒤면 딸은 캐나다로 돌아갈 테고 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봐야 하는데 말이다.
지난번 딸을 만나던 날 석양이 지는 바다는 아름다웠다. 딸은 엄마의 반찬 보다 시간 내서 와준 엄마가 반가웠을 테고, 나 역시 딸이 사준 맛있는 밥 보다 좋은 걸 대접하려 고심한 마음에 위로받았다. 각자 준비한 음식에 담은 마음이 서로를 돌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엄마, 바다 보러 와~!" 딸이 말할 때 '엄마, 보고 싶으니 어서 와요'라고 알아듣는 내 마음엔 지난한 걱정과 염려가 떠나고 상쾌한 바람이 살랑 불었다. 우린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일랑 미리 하지 말자고 자주 말했다.